유신재
코인데스크코리아 편집장
그레그 투사르는 2000년부터 2013년까지 골드만삭스에서 일하며 전자거래(electronic trading) 부문 수장을 지냈다. 주식 투자 업무에서 컴퓨터와 인터넷이 빠른 속도로 인간을 대체해가던 시기 세계 최대 투자은행에서 이런 변화를 이끈 ‘퀀트’(quant·금융공학자)들의 우두머리를 맡았다는 얘기다. 주식시장에 대한 세계 최고 전문가로 꼽아도 무리가 없을 인물이다.
투사르는 지난 연말 영업을 시작한 타고미(Tagomi)라는 블록체인 스타트업을 공동창업했다. 세계 최초의 암호화폐 브로커리지 회사다. 현재 암호화폐 시장에선 개인 투자자들이 직접 거래소에 주문을 넣어 거래를 하는데, 주식시장의 증권사처럼 고객의 주문을 대신 체결해주는 사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단순한 주식시장 구조에서는 대체 왜 수수료를 떼가는 증권사를 거쳐야만 하느냐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지만 미국은 상황이 다르다. 미국에선 같은 종목 주식이 10여개 거래소를 포함한 50여개 플랫폼에서 거래된다. 이런 분할된 시장(fragmented market)에서는 플랫폼마다 가격이 조금씩 다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브로커리지 회사가 제공하는 핵심 서비스 중 하나가 ‘스마트 오더 라우팅’(smart order routing)이다. 고객에게 가장 유리한 가격에 거래가 체결될 수 있도록 컴퓨터 알고리듬을 이용해 주문 경로를 선택해주는 서비스다.
비트코인을 비롯한 수많은 암호화폐가 전세계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암호화폐 시장은 극단적으로 분할된 시장이다. 투사르의 새 회사의 주력 무기도 스마트 오더 라우팅이다. 여러 거래소에 계정을 만들지 않고도 가장 좋은 가격에 암호화폐를 사고팔 수 있다니 투자자 입장에서는 매력적이다.
이제 갓 설립된 회사의 미래를 점치는 게 섣부르긴 하지만 이런 회사가 대세로 자리잡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상상해보게 된다.
세계 여러 거래소를 넘나드는 이런 회사들이 많아지면 거래소 간 가격 차이는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김치 프리미엄’도 사라지지 않을까. 개별 거래소 단위에서 일어나는 시세조종도 더는 통하기 힘들 것 같다. 거래소들은 최대 고객이 된 브로커리지 회사들을 모시기 위해 어떤 경쟁을 하게 될까? 수수료를 낮추고 안전성과 투명성을 크게 강화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지 않을까?
상상력을 펼치다 보니 ‘어? 지금 암호화폐 시장의 여러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수도 있겠네?’ 하는 생각이 든다. 관치에 익숙한 사고방식 탓에 시장을 정화하고 질서를 세우기 위해 촘촘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갇혀 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글로벌 금융기관의 최고 전문가들이 속속 암호화폐 업계로 진입하는 것을 보면 규제보다도 혁신적인 기업의 등장과 경쟁으로 시장과 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헛된 상상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암호화폐 관련 사업을 하려는 기업들은 정부 눈치를 보는 은행들로부터 법인계좌도 발급받지 못하고 있다. 답답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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