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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블랙리스트 대법원 참사, 정부 책임은 없는가 / 송경동

등록 2020-02-10 18:22수정 2020-02-11 02:37

송경동 ㅣ 시인

2016년 9월경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밝혀졌다. 박근혜 청와대와 국정원, 정부 여타 기관들이 ‘좌파척결’이라는 ‘저강도 쿠데타’를 위해 1만여명에 이르는 문화예술인들의 성향과 활동을 위법하게 수집 작성하고 검열, 사찰, 배제 등을 일상적으로 실행해온 가공할 국가범죄였다. 그것만으로도 박근혜 정부는 탄핵 대상이었다. 문화예술인들은 그해 11월4일 7500인 선언을 하며 노동자들과 함께 광화문광장에 ‘박근혜퇴진 캠핑촌’을 꾸리고 저항에 나섰다. 블랙리스트 버스를 만들어 세종시 문체부 청사를 포위하는 사회적 행진에 나서기도 했다.

김기춘 등을 특검에 고소·고발한 것도 문화예술인들이었다. 추가로 국정원을 고소·고발하고, 박근혜의 탄핵사유에 블랙리스트 건이 인용되지 않은 것에 항의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내놓은 것도 진즉이다. 그러나 국정원이 제대로 된 조사를 받았다는 얘기는 들은 바 없고, 헌법재판소는 몇년째 소식이 없다.

안타깝지만 현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무책임했다. 전 ‘블랙리스트 진상규명 및 제도개선위원회’는 2017년 조사관 3명에 3개월짜리로 졸속 설계되었다가 문화예술인의 저항에 부딪혀 간신히 11개월짜리가 될 수 있었다. 그중 2개월은 백서 발간 업무였다. 조사권 등이 없는 장관 자문기구라는 허술한 위상. 그럼에도 민간은 청와대와 정부의 협조 약속을 믿고 최선을 다했다. 그 과정에 정부여당은 7조원에 이르는 문체부 예산은 지키면서도 2018년 블랙리스트 진상규명 예산 8억원은 야당이 동의해주지 않았다는 손쉬운 핑계로 0원을 만들어 와 활동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숱한 모멸의 시간들. 조사위 활동이 끝나고도 131명 책임규명권고안에 대한 답이 징계 0명이라는 사실에 분개해 다시 ‘블랙리스트, 블랙라스트’ 전국 문화예술인 행진에 나서기도 했다. 후속조치로 약속되었던 ‘예술인지위권리보장법’ 등은 여전히 표류 중이다.

블랙리스트 민사소송에 참여한 문화예술인들이 1심에서 승소하자, 정부와 문체부는 이에 불복해 항소했다. 항소 취하를 요구했지만 받지 않아 공식적으로 문재인 정부는 ‘항소함’을 통해 법원 판결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진상규명의 책임당사자여야 할 청와대, 정부, 국회는 무관심에 무대책인데 현장 문화예술인들만 여전히 발을 동동거리는 적반하장의 어이없는 현실이다.

그 와중에 박근혜 시절 문체부 기조실장과 제1차관을 지낸 송수근은 계원예대 총장으로 버젓이 취임해 있다. 기조실장 시절 송수근은 김기춘 등의 지시에 따라 ‘건전문화예술 생태계 진흥 세부실행계획’을 작성 보고하고, 이의 실행 점검 및 보고를 위해 매주 1회 개최되었던 ‘건전콘텐츠활성화티에프(TF)’ 단장으로 문체부 내 블랙리스트 실행의 커다란 몸통이었다. 그런 이가 청년 문화예술인들을 가르치는 예술대학 총장으로 간다는 상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블랙리스트 사건 당시 민주당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간사로 일했던 유은혜 교육부 장관은 이런 총장을 용인해주고 있다.

여기에 더해 며칠 전 대법원은 김기춘, 조윤선 등 판결에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 적용은 좀 더 엄격해야 하니 추가심리하라고 재판을 고법으로 파기환송시켰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헌법 전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라는 평등의 원칙을 부정하고, 나아가 표현과 양심의 자유, 정치사상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문화국가의 원리 등을 짓밟은 희대의 헌법유린 국가범죄다. 이명박 시절부터 실행되었다는 것이 영포빌딩 지하 압수수색 당시 증거자료들을 통해 확인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재판부와 대법원은 이런 중함과 명백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라는 지극히 형식적인 기소로만 일관해왔다. 히틀러 치하 문화공작을 펼쳤던 괴벨스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로 기소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은 희극이다. 나아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 적용마저 더 엄격히 해야 하고, 이들에게 포괄적 책임을 묻는 것도 법리상 오해가 있을 수 있단다. 박근혜 재판부는 이를 재빨리 받아 관련 혐의 입증을 다시 하라고 했다. 어디선가 블랙리스트 하위 공모자들은 얼굴이 환하게 필 것이다.

차라리 파기환송이 잘된 건지도 모른다. 지난 1심과 2심, 대법원에서는 김기춘 등이 구속되기 전 특검의 한정된 조사에 근거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밝혀진 일부 사실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 자료에는 재외한국문화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국립극단, 한국문학번역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한국공연예술센터, 국립국악원, 광주비엔날레 등에서 전방위적으로 실행되었던 블랙리스트의 전모가 추가조사되어 있다. 하여 문체부는 즉각 이 모든 증거자료를 파기환송 재판부에 제출하길 바란다. 청와대도 조사기록의 검찰 이관을 명령하길 바란다. 정부가 이런 핵심자료의 제출을 꺼린다면 단 한 톨의 증거라도 찾아내려 ‘온 나라를 압수수색’하곤 하는 윤석열 검찰이 필히 전부를 압수수색하길 바란다. 파기환송심 재판부와 검찰은 이런 자료 확보와 함께 피해당사자였던 문화예술인들이 재판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요청해 오길 바란다. 지난 1, 2심과 대법원의 미진한 심리와 심각한 법리오해마저 바로잡는 파기환송심이 되길 바란다.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2018년 11월6일 당대표실에서 문화예술계 대표들을 만나 미진한 진상규명 등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을 위해 현장문화예술인과 함께 ‘블랙리스트 진상규명 및 문화행정혁신을 위한 티에프’를 꾸리기로 합의한 내용을 지키길 바란다. 힘없고 권한 없는 우리지만 이대로 잠잠해질 거라는 기대들은 하지 말길 바란다. 진실은 그렇게 묻히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도 더 이상 문체부 장관이나 해당 비서관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직접 나서서 대통령의 직접사과와 대국민보고, 미진한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재발방지,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요구 등에 답해 나가길 바란다. 최소한의 약속과 책임조차 방기하는 촛불정부라면 촛불정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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