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ㅣ 영남대 학술연구교수
코로나19로 학교는 개학을 미루고, 식당과 거리에는 사람이 없으며 버스와 전철에서는 마스크를 쓰고 서로가 의심의 눈빛으로 경계하고 있다. 누군가 마른기침이라도 하면 자리를 피하기가 일쑤다. 어느 누구도 이번 코로나19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대상이 보이지 않기에 더 두렵다. 지역전파가 시작되었고 정부는 감염병 위기 경보를 ‘심각’ 단계로 격상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일부 ‘종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 그리고 ‘인권’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다. 전광훈 목사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죽길 각오했다”고 외치며 조롱하듯 집회를 강행했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라며 검사를 거부하고 자가격리의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 과연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비타협적인 자결권의 주장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까?
비상의 상황에서 근본주의적인 그리고 맹목적인 개인의 권리에 대한 주장은 공동체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한 사람이 100명과 접촉하고 그 100명이 각각 또다른 100명과 접촉하여 방역의 대상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상황에서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의 무분별한 권리 주장은 공동체 전체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다. 따라서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공적 이성’이다. 공적 이성을 바탕으로 개인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국가의 강제성에 대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인권과 종교의 자유는 민주주의 국가의 중요한 가치이지만 그 때문에 어떠한 제한도 가해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이번 사태로 인해 우리 사회가 배워야 할 교훈은 개인위생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개인은 자신의 위생관리를 철저히 하고 청결한 환경에서 병에 걸리지 않을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식되어왔다. 다시 말해 개인은 바이러스라는 외부의 적에 대한 보호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존 관점으로는 대규모 전염병을 예방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인간이 환경에 가한 충격과 변화, 국외 여행, 습지 파괴, 기업의 축산업 혁명, 급격한 도시화와 그에 따른 대규모 슬럼의 성장은 인플루엔자의 비정상적 변이 가능성을 증가시켜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은 단순히 권리의 담지자가 아닌 전염병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의무의 담지자가 되어야 한다. 개인은 전염병 환자로서의 가능성과 질병을 확산시키는 매개자로서의 가능성을 동시에 가진 존재이다. 따라서 자신의 건강에 대한 보호와 더불어 내가 언제든 바이러스의 숙주가 되어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최소화할 책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며 그것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의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손을 씻고 마스크를 쓰며 감염이 의심되면 바로 신고해야 하는 이유는 나의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 전체의 안전을 위해서이다. 이제 전염병과 바이러스의 문제는 단순히 의료와 보건행정의 문제가 아니다.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정치적 그리고 안보적 차원의 문제다. 더군다나 현대 사회는 과거와 다르게 지구온난화 현상, 야생동물 서식 공간의 축소, 도시 밀집화 그리고 이동·유통의 고속화 등으로 전염병의 확산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커진 상황이다. 이는 현대 국가 및 시민의 가장 큰 위협이 핵이나 전쟁 혹은 테러 등의 물리적 폭력이 아닌 바이러스나 전염성 질병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바이러스와 전염성 질병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시급한 이유이다.
지난 50년 동안, 300종 이상의 감염병이 한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곳에서 새롭게 출현하거나 재출현했다. 그리고 그 출현 빈도가 점점 잦아지고 있다. 전염병학자 대부분은 다음 두 세대 안에 치명적인 전염병을 초래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에볼라일 수도 있고 조류인플루엔자나 코로나바이러스 혹은 항생제 내성 슈퍼박테리아일 수도 있으며 전혀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다. 아마도 전염병의 도래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개인의 보건은 공동체 안보의 관점에서 다루어져야 할 사안이 되었다. 개인 보건의 문제는 시민적 의무의 관점에서 새롭게 규명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질 때 또다시 제기될, 개인의 자기결정권과 국가의 개입 사이의 갈등에서 합리적인 균형점을 찾기 위해서라도 그러하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