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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9월 신학기제’ 세차례나 검토하고도 접은 까닭 / 허병두

등록 2020-04-06 16:25수정 2020-04-07 02:39

허병두 ㅣ 서울 숭문고 교사·전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

‘9월 신학기제’ 도입을 하자는 주장이 일부에서 나오고 있다. 하지만 안전 문제 때문에 개학을 늦추자는 것과 9월 신학기제를 도입하자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코로나19 사태에 맞서 지혜를 모으고 온 힘을 쏟아야 할 중차대한 시기에 제기되는 이러한 주장은 우리 교육계와 사회 전반에 엄청난 혼란과 손실을 줄 수 있다.

9월 신학기제는 1997년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회에서 처음 논의된 이래 세차례나 진지하게 검토하다가 제쳐 놓은 바 있다. 현행 제도와 9월 신학기제는 각각 장단점이 맞서 있다. 오히려 북반구 국가에서는 봄에 학년을 시작하는 것이 오전에 일과를 시작하는 것처럼 훨씬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9월 신학기제를 도입하자는 쪽에서는 장점은 지나치게 과장하고 단점은 축소하거나 외면하고 있다. 특히, 제도 변경에 따른 천문학적 비용(2014년 한국교육개발원 추산 10조5천여억원), 쉽게 산출하기도 불가능한 일손과 시간의 부담을 그리 쉽게 무시하면 안 된다.

9월 신학기제는 정확히 말하면 9월 신학년제다. 지금 도입하면 가장 큰 피해자는 가뜩이나 불안하고 불편한 현 재학생들이다. 올해 9월에 대학 입학을 할 수는 없으니 고3과 재수생은 내년 3월에 진학하고, 고2는 내년 9월에 입학할 것이다. 2021년 2학기부터 이들이 다니는 대학의 북새통을 생각해 보라. 모든 게 갑작스럽게 두 배가 되며 이들이 겪는 피해는 졸업 후에도 계속된다. 이들은 평생 취업 같은 경쟁은 물론 각종 혜택에서도 현저하게 불이익을 받게 된다.

이를 줄이려고 3개년에 걸쳐서 2개월씩 앞당긴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충격만 조금 줄 뿐 일방적인 피해를 평생 받아야 할 당사자인 재수생부터 고교생, 중학생, 학부모들이 과연 동의할 수 있을까? 올해부터 고3이 투표권을 갖게 되었는데 형평성에 어긋나는 이러한 정책 변경이 쉽게 받아들여지기도 어렵다.

반면 9월 신학년제 도입의 기대 효과는 침소봉대하며 환상을 심어 준다. 우리 교육을 국제 추세에 맞출 수 있으니 좋다는 주장만 해도 사실상 유학생 집단에 국한된다. 1997년 처음 도입을 검토할 때에도 외국으로 유학을 간 10만여명의 초중고 학생들이 뒤처지지 않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강조되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 오는 20만여명의 유학생, 특히 중국 유학생을 대학에서 받기 쉽게 해달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일본이 4월에 시작하니 현행 제도가 친일 잔재라는 말도 지나친 견강부회다. 춘삼월 봄에 모든 일정을 새로 시작하는 것은 삼라만상의 리듬에 맞아 우리 전통과 일상생활에 자연스러울 뿐이다. 9월 신학년제가 도입된다면 지금 초중고교는 2학기를 혹한기인 1월 셋째 주부터, 1학기는 혹서기인 8월 둘째 주에 앞당겨 열어야만 한다. 어른에게도 너무 춥고 무덥다. 북한이 1996년에 4월 신학년제로 바꾼 점도 시사하는 바가 여러 가지 있다.

10조원이 훌쩍 넘을 직접비용이면 50만원 정도의 교육용 노트북을 2천만명 이상에게 보급할 수 있다. 또한 1만곳이 넘는 전국 초중고교에 해마다 1억원씩 10년 동안 줄 수 있는 규모다. 개개인이나 학교가 일구어낼 성과들은 9월 신학년제 도입보다 훨씬 구체적이며 실질적이다.

9월 신학년제는 ‘계륵’일 뿐이다. 아무리 남의 떡처럼 커 보여도 치명적인 희생자 집단을 만들고 온갖 낭비와 손실,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취해야 할 지상 목표가 아니다. 현재의 난국을 해결하고 새로운 ‘교육 한류’의 큰길을 열기 위하여 개혁의 방향과 동력을 옹골차게 가다듬어야 한다. ‘아니면 말고’ 식의 태도는 개혁의 걸림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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