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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비장해지지 말자 / 이현서

등록 2020-05-04 18:31수정 2020-05-05 02:07

이현서 ㅣ 코로나 사태 국면에서 실직한 40대 여성

지구를 지킨다든가, 나라를 수호한다, 경제를 살린다, 대통령을 호위한다 따위의 비장한 자세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망울을 터뜨리는 새순을 보며 비장해지는 사람은 드물다. 저녁밥을 지을 쌀을 비장한 자세로 씻는 사람은 없다. 일상의 작은 것에는 잘 비장해지지 않기 마련이다. 비장한 것은 대개 덩치가 크다. 큰 덩어리는 작고 현실적인 요소를 자주 은폐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것에 대한 충성도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충성이라는 행위는 집착, 인정욕구, 존재감 과시와 같은 ‘충성 그 밖의 것’을 자주 은폐하기 때문이다. 또한 충성이라는 비장한 행위는 그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해, 충성 이전에 필요한 ‘왜, 무엇에 충성하는가’ 하는 근원적 질문에 필요한 에너지를 남겨놓지 않기도 한다(충성을 바쳤던 직장에서 해고되어 본 사람은 이 말의 뜻을 알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 회사가 부도나 한강에 몸을 던진 사건이 하루걸러 신문에 났지만, 그 와중에도 부자들은 경매로 나온 부동산을 ‘줍줍’하며 ‘이대로 쭉~’을 외쳤다. 코로나로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모르는 기회를 ‘줍줍’하며 속으로 흐뭇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생계고로 해고되었다고 하고, 어떤 가족은 자살했다고 한다.

코로나 생계 긴급지원을 두고 여러 의견이 오간다. 소득 하위 70%냐, 모든 국민에게 지급하느냐, 30만원이냐, 50만원이냐, 100만원이냐 하는 사회적 논쟁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다만 하루라도 빨리 집행되어 이 시국에 속 타는 사람들의 얼어붙은 발을 잠깐이라도 녹여 다음 걸음을 내딛도록 해 줬으면 좋겠다.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 사안을 대하는 태도이다. 총선이 화장실도 아닌데, 일 치르기 전과 후의 태도가 바뀌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집에 살고 있는 열 살짜리 어린이도 하루아침에 약속을 바꾸면, ‘누굴 바보로 아느냐’면서 화를 낸다. 조령모개하는 태도는 말하는 사람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종내 말하는 이를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 뿐이다.

또 하나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비장하게 충성하는 태도이다. 말하자면, 재정 건전성을 지키겠다는 ‘충심’과, 대통령과 여당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는 ‘비장함’이다. 하지만 왜 그토록 재정 건전성을 지켜야 하는 것일까. 공무원은 시민들의 삶을 위해 고용된 ‘시민의 종복’(civil servant)이지, ‘금고지기’가 아니다. 금고는 기획재정부가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금고가 시민의 삶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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