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ㅣ 그린피스 한국사무소 기후에너지 전문위원
2000년 가을에 영국을 포함한 유럽의 많은 지역에 기록적인 폭우가 와서 홍수가 났다. 이후 영국 정부는 기후변화로 인해 앞으로 이런 홍수가 얼마나 자주, 얼마나 광범위하게 올 수 있는지 연구하고 그 결과를 2004년 4월 <미래의 홍수>(Future Flooding)라는 보고서로 발표했다.
영국 연구팀은 축적된 기상 데이터에 근거해 최근의 홍수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파악했고, 과학적 접근을 통해 미래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예측해 볼 수 있었다. 연구 결과는 온실가스 배출 관리 여부에 따른 4가지 시나리오로 나왔다. 온실가스 배출량에 따라 지구 기후가 변하고 그 변화 정도에 따라 강수량과 강수 패턴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분석에 따르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고 더 많은 비가 올 것에 대비해 방제 조처를 강화하면 재산 피해를 국내총생산(GDP)의 0.1% 정도로 제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대비하지 않을 경우 홍수로 인한 피해는 지디피의 0.4%까지 높아진다. 선진국의 지디피 성장률은 약 2% 수준이다. 온실가스 저감 여하에 따라 경제 성장률이 1.6%가 될 수도 있고 1.9%가 될 수도 있다는 건 아주 큰 차이다. 2019년 영국 지디피는 약 4천조원이다. 홍수 피해 규모를 지디피의 0.4%에서 0.1%로 0.3%포인트 줄이면 12조원의 피해를 막을 수 있다. 결국 온실가스 감축 정책은 재난을 방지하며 동시에 경제 성장을 도모하는 정책인 것이다.
영국 정부는 이런 ‘불길한’ 연구 결과를 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적 논의가 활성화되었고 온실가스 감축 목표는 과학적 진단에 따라 2050년에 80% 감축으로 정해졌다. 이 목표는 기후변화가 기존 예측보다 더 빨리 진행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최근 100% 감축으로 강화되었다.
예년에 견줘 두배 가까운 비가 쏟아진 이번 장마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가? 홍수로 초래된 피해를 놓고 지엽적인 논란만 시끄러울 뿐이다. 과학적 시각에서 상황을 분석하고 근본적인 원인인 온실가스 감축을 진지하게 논의하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지난 7월 그린뉴딜 계획을 발표했다. 그린뉴딜 정책에는 전기차와 수소차 보급 촉진, 건물 단열 개선, 재생에너지 연구 강화 및 보급 확대 등 기후변화 대응에 도움이 되는 사업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해당 계획에는 온실가스 감축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절박감과 큰 그림이 결여되어 있다.
기후변화에 대해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 일부 국회의원들이 기후변화 관련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이러한 법안에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2030년까지 지금의 절반으로 줄이고 2050년까지 제로로 만든다는 목표가 들어가야 하며, 앞으로 더욱 심해질 홍수와 각종 극한 기상 현상에 대한 대비를 강제하는 조항도 포함되어야 한다. 늦은 대응인 만큼 비상한 대책이 필요하다.
영국은 2019년까지 온실가스를 1990년보다 45.2% 감축하고 재생에너지 전력 비중도 37.1%로 높이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는 점을 인정해 기후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내연기관 자동차 퇴출 시점을 2032년으로 앞당겼으며 재생에너지의 더욱 빠른 확대를 지원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최악의 폭우가 지나가고 열대야와 폭염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폭염이 꺾일 시점에는 지구온난화로 뜨거워진 바다에서 만들어진 더욱 강력한 태풍이 한반도에 날아올 수 있다. 2019년에는 링링·타파·미탁 등 3개의 가을 태풍이 날아와 피해를 입혔다. 가을 태풍이 3개나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친 것도 드문 일이었다. 이런 역대급 기록들은 앞으로 계속해서 경신될 것이다.
이번 여름의 홍수와 폭염을 계기로 하여, 국제사회와 공조하겠다는 등의 추상적인 대책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이 폭염과 폭우로 황폐화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절박한 인식으로 대응에 나서기 바란다. 미래의 홍수와 폭염은 이미 오늘의 현실이 되었다. 과학자들이 오래전부터 경고했던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