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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성한용 칼럼] 여론조사로 정치가 망가지고 있다

등록 2021-07-07 16:16수정 2021-07-08 09:04

명예욕과 권력욕은 인간의 원초적 욕구다. 멀쩡했던 사람도 여론조사 수치가 갑자기 올라가면 눈이 돌아간다. ‘내가 바로 하늘이 낸 대통령일지도 모른다’거나 ‘나는 워낙 똑똑하기 때문에 대통령 정도는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6월29일 대선 출마를 발표한 다음날 국회 기자실을 찾아와 <세계일보> 기자들에게 “그때 그 조사 아니었으면 내가 여기까지도 안 왔다”고 말한 2020년 1월31일치 <세계일보> 기사. 아이서퍼 갈무리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6월29일 대선 출마를 발표한 다음날 국회 기자실을 찾아와 <세계일보> 기자들에게 “그때 그 조사 아니었으면 내가 여기까지도 안 왔다”고 말한 2020년 1월31일치 <세계일보> 기사. 아이서퍼 갈무리

성한용 선임기자
성한용 선임기자

차기 대선 주자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전 검찰총장 지지도가 조금 떨어졌다. 부실한 출마 선언과 장모 구속이 단기 악재로 작용했을 것이다. 대선 정국, 특히 야권의 지형은 당분간 윤석열 전 총장 지지도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첫째, 지지도가 오르면 윤석열 전 총장이 국민의힘을 제치고 정국 주도권을 쥘 것이다. 정당을 새로 만들어 국민의힘을 흡수하거나 선거 직전 후보 단일화를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둘째, 지지도가 내려가면 정국 주도권은 국민의힘으로 넘어간다. 윤석열 전 총장은 국민의힘에 입당해서 홍준표, 유승민, 원희룡 등 당내 주자들과 경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지지도가 급속히 떨어지면 대선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야권 주자들의 각축이 벌어질 것이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대체재로 약진할 수도 있겠다.

어떤 경우든 앞으로 계속 쏟아질 여론조사 수치에 윤석열 전 총장과 보수 야권의 운명이 달린 셈이다.

‘정치인 윤석열’의 시작도 여론조사였다. 6월29일 대선 출마 선언에 이런 내용이 있다.

“공직 사퇴 이후에도 국민들께서 사퇴의 불가피성을 이해해주시고 끊임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그 의미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중략) 정권을 교체하는 데 헌신하고 앞장서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음날 국회 기자실을 찾았다. <세계일보> 부스에서 그는 기자들에게 “그때 그 조사 아니었으면 내가 여기까지도 안 왔다”고 했다. 2020년 1월31일치 ‘윤석열, 새보수·무당층 지지 업고 급부상’ 기사를 얘기한 것이다.

당시 <세계일보> 여론조사는 이낙연 32.2%, 윤석열 10.8%, 황교안 10.1%, 이재명 5.6%, 박원순 4.6% 순서였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고) 현직 검찰총장이 제1야당 대표를 따돌리고 2위로 올라선 첫번째 여론조사였다. 윤석열 전 총장의 발언은 여론조사 때문에 정치적 야심을 갖게 됐다는 고백인 셈이다.

여론조사는 ‘밴드왜건 효과’를 수반한다. 밴드왜건 효과는 대중적으로 유행하는 대세를 따라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 현상이다.

그런데 현실 정치에서 여론조사의 폐해는 바로 이 밴드왜건 효과 때문에 발생한다. 특히 반정치주의에 기대어 정치에 진입하는 ‘정치 문외한’들을 막기 힘들다. 당사자의 착각 때문이다.

2011년 박원순 변호사에게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를 양보하고 인기가 치솟자 2012년 대선에 나섰던 안철수 대표가 그런 경우였다. 2017년 탄핵으로 폐허가 된 보수세력의 대안으로 떠올랐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그런 경우였다.

하긴 명예욕과 권력욕은 인간의 원초적 욕구다. 멀쩡했던 사람도 여론조사 수치가 갑자기 올라가면 눈이 돌아간다. ‘내가 바로 하늘이 낸 대통령일지도 모른다’거나 ‘나는 워낙 똑똑하기 때문에 대통령 정도는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다. 고건·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여론조사 호출에 응하지 않고 물러서는 바람에 체면을 지켰다.

민심을 읽어야 하는 정치에서 여론조사는 필수다. 그러나 참고만 해야 한다. 여론조사는 기본적으로 무책임하다. 단순한 선호도 조사가 열의를 가진 진짜 관심층의 고뇌에 찬 정치적 선택을 대체할 수 없다.

정권 교체 여론이 정권 유지보다 높은데 이재명 경기지사가 윤석열 전 총장을 이긴다. 같은 조사에서 그런 결과가 나온다. 모순이다.

당내 경선과 후보 단일화를 여론조사로 하는 것은 사실상 도박이나 다름이 없다. 그게 우리 정치의 현실이고, 수준이다. 부끄럽다.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선거인단을 모집해서 모바일로 투표하면 된다. 과거처럼 돈 주고 당원을 모집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조직 동원을 아무리 해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민심을 이기지 못한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선거인단 투표 50%, 여론조사 50%를 반영해서 선출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100% 여론조사로 바꾸자는 의견이 있다. 홍준표 의원이 “그럼 뭐 하러 직접 투표하나. 여론조사 기관하고 해버리지”라고 일갈했다. 홍준표 의원의 말이 옳다.

선출직 공직자를 뽑는 투표는 주권자인 국민이 권력을 행사하는 신성한 절차다. 당내 경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론조사 경선은 하면 안 된다.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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