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숙 | 그래픽노블 작가
쓰러질 듯 서 있는 저 할아버지는 혹시 아픈 걸까? 당근, 감자, 초코를 데리고 산책 가는 길이었다. 풀밭에 있는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다. 구부정하고 말랐다. 가만 보니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있다. 무얼 하시나? 돌을 옮기고 있네. 멋대로 자란 풀밭은 돌밭이기도 했다. 저 많은 돌들을 다 옮기려는 걸까?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 할아버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돌을 옮기고 있었다. 한 발자국 떼는 데 한 시간 걸릴 듯한 몸짓으로 움직였다. 저 돌들을 대체 왜 옮기는 걸까?
서울에 일이 있어 나가던 길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밭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눈에 띄었다. 허리를 구부린 채 일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아버지가 연상되었다. 나의 아버지도 늘 밭에서 살았다. 내가 학교를 가던 아침에도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에도 아버지는 밭에 있었다. 돌을 나르던 그 할아버지처럼.
밭에는 할머니가 더 많았다. 어렸을 때엔 왜 할머니들이 허리가 기역자인지 알지 못했다. 커서 밭에서 감자를 캐 보고 알았다. 종일 앉아서 밭일을 하다 보면 제일 아픈 게 허리였다. 나는 젊었는데도 아이고 허리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시골에 젊은 사람들은 거의 없다. 서울만 가도 나는 선생님 소리를 듣는다. 그 이유는 도시에서는 내가 나이가 많은 편이어서인 것 같다. 선생님 소리를 듣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선생님은 누군가를 가르쳐야 할 것 같다. 가끔 “존경한다”라는 말도 듣는다. 그럴 때면 정말 내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에게 여러 번 실망했다. 어느 면에서 존경스러워도 다른 한 면이 부족할 수 있다. 그걸 알면서도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아름다운지도 모르겠다만 존경한다는 표현보다는 좋아한다는 말을 선호한다. 시골에서 나는 제일 젊은 축에 속한다. 어떤 이웃은 내게 만날 때마다 새댁이라고 부른다. 들을 때마다 적응이 안 된다. 풉, 웃음도 터진다. 새댁이라니, 아이고 징그러.
서울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은 해 질 무렵이었다. 돌을 나르던 할아버지가 풀밭에 여전히 서 있었다. 다음날 당근이, 감자, 초코의 아침 산책길에도 그는 그곳에 있었다. “할아버지, 여기에서 주무셨어요?” 하고 내가 농담을 건넸다. 할아버지가 웃었다. 무어라 대답을 했는데 너무 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할아버지는 조금씩 자리를 움직였다. 할아버지가 자리를 움직일수록 돌들은 한쪽으로 쌓여갔다. 할아버지가 풀을 뽑기 시작했다. 풀을 뽑는 속도도 느렸다. 젊은 사람이었다면 며칠 안 걸렸을 것을 할아버지는 영원히 끝내지 못할 것 같은 속도로 풀을 뽑았다.
7월이 되니 날이 급하게 더워졌다. 습기로 가만히만 있어도 온몸이 축축했다. 여름에는 꽃이 별로 없을 줄 알았다. 집집마다 담장 아래 접시꽃이 한창이다. 분홍색, 빨간색, 하얀색. 모양도 여러 가지다. 접시꽃은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키를 키우고 대문 밖에 서 있는 것 같다. 접시꽃 길을 지나니 논이다. 논 풍경은 사계절이 아름답다. 이맘때는 초록색 논이 초록 바다처럼 술렁인다. 그 뒤로 운무가 마니산을 둘러싸고 있다. 마치 수묵화가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듯하다.
복날을 통과하며 목줄에 매여 있던 개들이 하나둘 보이지 않는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김을 매는 아줌마에게 묻는다. “여기 있던 개 어디 갔어요?” “팔렸어요.” “누구에게요? 개장수에게요?” 아줌마가 대답한다. “아니, 개 먹는 사람.” 프랑스인 남편이 따라 한다. “살렸어요. 개 먹는 사람.” 나는 짜증이 난다. “살렸어요가 아니라 팔렸어요.” 남편은 나를 따라 한다. “살렸어요. 개….”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른다. “살렸어요가 아니라니까. 개 팔렸대 개 먹는 사람한테.”
우측을 보니 작년 초에 당근이 엉덩이를 물고 안 놔주던 개, 해피가 당근이를 보더니 다시 달려든다. 다행히 목줄에 묶여 있다. 해피 주인은 나이 많은 할아버지다. 해피가 더울까봐 파라솔을 쳐놓았다. 대문 아래 계단 옆에는 새끼 고양이 집까지 만들어 놨다. 당근이를 물었던 해피지만 자기 개와 새끼 고양이를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에 조금 위로가 된다.
산책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은 어둑어둑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비바람에도 견딜 수 있게 고추가 꼼꼼하게 잘 묶여 밭을 이루었다. 그 옆에 깻잎, 대파, 감자 밭이 펼쳐져 있다. 돌 위에는 호박 넝쿨이 수북하다. 할아버지는 그 넓었던 돌밭, 풀밭을 일구어 멋진 밭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