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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금숙의 강화일기] 세번째 봄

등록 2022-05-08 18:05수정 2022-05-09 02:34

김금숙 | 그래픽노블 작가

강화에서 세번째 봄을 맞는다. 옆집 김정택 목사님네 산수유꽃이 봄을 가장 먼저 알렸다. 노란 꽃은 아직은 싸늘한 길 위에서 불꽃처럼 터졌다. 얼마 뒤 영주네 집 목련이 등불처럼 하얗게 하늘에 대롱대롱 달렸다. 목련이 활짝 피었을 때보다 바로 직전을 좋아한다.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듯한 그 모습은 터지자마자 갈색으로 변한다. 이제 막 열린 목련은 느닷없이 따스해진 다음날 점심 무렵 활짝 피었다. 그날 저녁 뜬금없이 비가 내렸다. 목련이 땅 위에 무겁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비 갠 아침, 길에는 하얀 목련이 흉하게 널브러졌다. 이틀을 살기 위해 긴 겨울을 기다린 목련꽃이었다. 너를 보려면 또 1년을 기다려야 한다.

다행히 벚꽃은 아직 지지 않았다. 당근이와 감자를 데리고 큰나무 카페 앞으로 갔다. 영주 집 옆이 큰나무 카페다. 벚꽃나무들이 목련나무 옆에 쭈욱 줄지어 있다. 하얀 벚꽃 사이로 분홍색 벚꽃이 피었다. 하얀 벚꽃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분홍색 벚꽃이 옆에 있어서다. 분홍색 벚꽃이 더 화사한 이유는 하얀색 벚꽃이 곁에 있어서다. 서울에서 벚꽃 구경하러 딱 한번 여의도에 간 적이 있다. 벚꽃보다 사람 구경만 실컷 하고 왔다. 강화에 살면서 굳이 어디를 가지 않아도 천지에 널린 것이 봄이어서 좋다. 꽃비가 내린다. 당근이, 감자도 황홀한지 입을 헤 벌리고 웃는다.

우리 집 마당에도 꽃이 피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 한잔 들고 오늘은 어떤 꽃이 피었나, 어떤 나무가 인사를 하나, 어떤 풀이 자랐나, 마당 이곳저곳을 기웃기웃한다. 우리 집은 분홍색 진달래가 가장 먼저 피었다. 이어서 재작년에 심었던 붉은 튤립이 수줍게 올라왔다. 작은 보라색 꽃도 돌 틈에서 솟아났다. 난 종류인 것 같은데 이름은 모르겠다. 백합도 예전에 당근이가 자고 나면 커 있고, 자고 나면 커 있듯 자고 나면 쑥쑥 키가 자라 있다. 비가 한번씩 올 때마다 모든 꽃나무가 1센티씩 자라는 듯하다. 죽었다고 생각한 포도나무에서 새잎이 난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무화과나무도 생존신고를 한다. 작년에 두세 뿌리 심은 황매화가 한달 사이에 땅에서 몇 가지가 나와 사방팔방으로 뻗어났다. 황매화는 마치 조선시대 과거 급제한 도령이 쓴 모자에 달린 꽃을 연상시킨다. 그러고 보니 이몽룡이 춘향이를 만난 날이 오월 단오였구나.

마당에 피는 꽃 중 가장 기다려지는 꽃이 바로 목단이다. 올해는 유달리 봉오리가 많다. 봉오리 안의 핏빛 꽃잎이 살짝 얼굴을 보여준다. 며칠 지나자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밀더니 활짝 피었다. 그 향기에 취한 건 나뿐이 아니다. 벌들이 웅웅거리며 목단 속으로 날아든다. 벌들이 사라졌다는 뉴스를 얼마 전에 읽었다. 우리 집은 벌들이 사과꽃에서 목단으로 배꽃으로 왔다 갔다 한다. 배꽃도 작년에 비해 많이 피었다. 하얀 배꽃은 예쁘지만 똥냄새가 난다.

내가 이렇게 한가로운 동안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는 새벽부터 바쁘다. 아흔이 다 된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오토바이 뒷좌석에 태우고 작년까지도 밭에 와서 일을 했다. 올해부터는 위험하다고 그냥 걸어 다닌다. 감자를 심고 벌써 옥수수도 심었다. 더 이상 농사를 지을 힘이 없다고 땅을 팔겠다고 한다.

감자, 당근이를 데리고 아침 산책을 나간다. 진돗개 모찌네를 지나 검은 개 앵두네 어름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황구 화강이네다. 봄이 왔는데 화강이네 건너편 할머니가 안 보인다. 늘 밭에서 살던 분인데 이상하다. 거름도 그대로다. 화강이 주인에게 물어보았다.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에 있다고 한다. 우리가 지나가면 호박도 주고 감자도 주던 마음 좋은 할머니였는데. 슬프다.

강화도 이 마을로 들어온 것은 책방 ‘국자와 주걱’ 김현숙 언니의 덕이다. 조금 더 가면 김중미 소설가가 살고 온수리에는 함민복 시인도 산다.

언제까지 내가 이곳에 살지는 모르겠다. 옛날이야기 중 나무꾼이 나무하러 산속에 갔다가 신선 둘이 바둑을 두는 모습을 보고 한나절을 보냈단다. 집에 갈 때가 되었다 싶어 내려왔더니 세월이 한참이나 지나버렸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부인은 할머니가 되어버렸는데 자신은 여전히 젊더라는 이야기로 기억한다. 내가 그 모양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오전이 슝 날아가버렸다. 봄날은 짧으니 몇날을 잠시 이렇게 살아도 괜찮지 싶다. 곧 논이 하늘을 담은 호수가 된다. 강화도는 사계절이 아름답다.

※친애하는 독자님들, 그동안 ‘김금숙의 강화일기’를 사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올가을에 단행본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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