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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친구는 ‘셔터맨’이라 부릅니다만…

등록 2021-07-21 16:18수정 2021-07-22 02:36

세상엔 용감한 사람들이 참 많아요. 텀블러, 유리용기 갖고 다니며 음식 포장해 오는 사람, 채식하는 사람, 산을 뛰어다니며 쓰레기를 줍는 사람(줍깅)까지. ‘그래도 미래가 밝네’ 하면서 다시 분리배출을 하러 가면 스스로 많이 부끄러워집니다. 저는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건가요.

[엄마아들 귀농서신] 선무영

시골로 가려는 아들·로스쿨 졸업

괴산에서 많은 벌레를 만났습니다. 신발 안으로 튀어 들어와 발바닥으로 만난 벌레, 수확 중 만난 벌집, 요상하게 생긴 온갖 날벌레, 땅벌레…. 대부분 익숙한데도 돈벌레는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을 것 같았어요. 괴산 돈벌레들은 특히 더 크고 빠른 듯했습니다. 기겁하는 아내를 위해 꾹 참고 얼굴을 맞대길 수차례. 이제는 가는 길 명복을 빌어주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일에도 익숙해지더군요. 농사지으며 마주하는 모든 것에 내성이 생길 거라 기대하지 않지만 이렇게 적응해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않겠습니까.

요새 새삼 어머니가 존경스러워요. 수준을 지키며 지속하는 ‘살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도맡아 하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회사 출퇴근하는 아내 아침저녁 차려주고 치우고, 청소, 빨래 하면 하루가 다 갑니다. 집안일은 꼼꼼히 하려고 들면 끝도 없죠. 친구는 저를 ‘샤따맨’이라 놀려요. 아내의 가게 셔터를 열고 닫아주면 전부라는 양, 돈 벌어 오는 아내 잘 만나서 편하게 산다는 거죠. 그런데 저는 집을 집답게 하는 일이 절대 편하지 않은데… 저만 그런 건가요? 이 일도 하다 보면 곧 적응이 되나요.

송구스럽지만 제가 하는 집안 ‘살림’은 어머니가 사명감을 갖고 노력하는 흙 살림에 미치진 못합니다. 뭘 청소 세제로 쓸지 따위는 소소한 문제예요. 분리배출이 진짜죠. 매일 저녁 분리배출을 하는데도 택배 몇개 받은 날이면 다시 산처럼 쌓입니다. 안 되는 것도 어찌나 많은지. 분리수거 업체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 열 중 아홉은 일반쓰레기가 돼요. 제대로 하자면 사흘에 종량제 봉투를 하나씩 써야 할 듯합니다. 제로웨이스트에 도전해봤지만 어림없어요. 물티슈, 키친타월 없이 행주, 걸레를 써보기로 한 지 일주일 만에 집에서 쿰쿰한 냄새가 나 포기했습니다. 가뜩이나 힘든 집안일 더 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세상엔 용감한 사람들이 참 많아요. 텀블러, 유리용기 갖고 다니며 음식 포장해 오는 사람, 채식하는 사람, 산을 뛰어다니며 쓰레기를 줍는 사람(줍깅)까지. ‘그래도 미래가 밝네’ 하면서 다시 분리배출을 하러 가면 스스로 많이 부끄러워집니다. 저는 제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건가요.

“하우 데어 유!”(How dare you·감히)라는 열여덟 툰베리의 외침에 전율하면서도 ‘그렇지만 어쩌겠어’라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런데 시골에 내려가야겠다고 마음먹은 뒤로는 뭔가 한번 해볼 수 있겠다 생각도 합니다. 이효리씨처럼 다 갖춘 듯한 분들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저처럼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사람이라도 시골에서 흙과 함께 의미 있는 삶, 조금은 다른 세계를 일궈보고 싶어요. 그러면 누군가 하나둘 그걸 또 참고하지 않을까요.

좀 더 패기 넘쳤던 시절 마음 맞는 사람들과 일을 꾸린 적 있어요. ‘베터’(Better)라는 사회공헌플랫폼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사람에게는 제각기 착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를 소소하게나마 표현하다 보면 자연히 더 나은 세상이 되리란 믿음에 시작했던 일이에요. 그 생각 여전합니다. 서 있는 자리도, 하는 일도, 가진 것도 다르지만 모두, 특히 청년들이 그 자신 생각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애쓴다면 자연스럽게 사회는 더 좋아지리라 생각하고 있어요. 소리 없는 혁명처럼 말이죠. 엠제트(MZ) 세대가 어쩌네, 이대남이 어쩌네 말도 많지만 어느 때보다 많이 배우고, 많이 경험한 20대 아닌가요.

도시에 그런 청년들은 많지만, 시골에는 아직 드문 것 같아요. 물론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분들의 호연지기를 보며 그렇게까지 살 자신은 없으며, 미디어에 노출되는 억대 매출의 부농들처럼 크게 성공하길 기대할 수도 없어요. 제가 가진 자본이란 보잘것없으니까요. 생존이 되어야 변화도 꾀할 텐데, 제가 내려가 살면 어떤 모습이 될지 아직 그림이 잘 그려지진 않아요.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는 곧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근사하니 부족함이 없지요. 그런데 직장이 아닌, 시골에서의 삶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어머니, 그 도전적인 분들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나요. ‘그들’을 찾고 그들이 없다면 제가 먼저 그들이 되어볼게요.

어머니 세대만 해도 평균이랑 다른 선택을 하는 게 참 어려웠을 거 같아요. 어머니가 직장일 하시고, 아버지가 집에 계셨다면 아마 두 분이 견디지 못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 처지를 보면 벌써 다르지 않습니까. 여전히 좀 이상하게 보는 분들이 많지만, ‘샤따맨’이라고 놀리는 친구(사실 부러워합니다)도 있지만, 남다른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응원해주시는 분들 또한 많습니다. 그런 ‘남다름’이 어떤 성과로 이어질지도 모르죠. 남다른 고민과 남다른 선택이 섞여야 남다른 사회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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