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이 추구해야 할 방향성을 재정립하겠다.”
지난 5일 정은보 신임 금융감독원장이 임명받은 직후 이런 내용의 취임 소감문을 내놓은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금융감독기구를 몇년 동안 취재해온 기자에겐 이 발언은 문재인 정부가 지난 4년간 취했던 금융감독의 방향이 잘못됐으니 새롭게 정립하겠다는 취지로 받아들여졌다. 그것도 취임 통지서를 받자마자 신임 원장이 이런 말을 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과연 청와대는 정 원장이 국정철학을 공유하고 있는지 검증을 하고서 임명을 했는지 의심스러웠다.
정 원장은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에서 금융 관련 요직을 거친 모피아(금융관료)의 적자 중 한명이다. 모피아는 ‘시장은 어린아이들의 놀이터가 아니다’(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라거나 ‘존재감만으로도 시장의 질서와 기강이 설 수 있도록 하겠다’(김석동 전 금융위원장)며 금융시장의 기강을 잡으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금융소비자보다는 ‘금융회사 프렌들리’라는 특성을 공유한다. 시장은 놀이터가 아니라는 발언을 한 ‘모피아의 대부’마저도 옵티머스 고문까지 지냈으니 더 할 말이 없다.
정 원장은 취임 첫날인 6일에는 “금융감독의 본분은 규제가 아닌 지원에 있다”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10일에는 정권 임기가 9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금감원 임원 전원에게 사표를 제출하라고 통보했다. 그동안 금융위원회와 금융회사가 껄끄러워했던 ‘강성’ 임원들을 물갈이하겠다는 속셈으로 읽힌다. 모피아의 귀환을 실감케 하는 행보다.
평시 같으면 이런 행보가 크게 문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2~3년간 금융시장은 파생결합펀드(DLF)와 사모펀드 사태라는 대형 금융스캔들을 겪었다. 규제의 빈틈을 노린 사기꾼들이 시장의 물을 흐리고 소비자들이 큰 피해를 당하자 금융감독기구는 도대체 뭘 했느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개혁 성향 학자 출신인 윤석헌 전 금감원장이 지난 3년간 금융소비자 보호를 최우선 목표로 내세우고 소비자 보호를 등한시한 금융회사와 그 경영진을 강도 높게 제재하며 규율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정 원장의 일련의 행보는 이런 윤 전 원장의 ‘그림자 지우기’에 나설 것임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이런 개혁 역주행 시도는 정권이 바뀌면 나타날 수 있을 것으로 예감하긴 했다. 그런데 현 정부 임기 중에 이런 일이 벌어지니 황당할 수밖에 없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무엇보다도 청와대 컨트롤타워가 김상조 정책실장 퇴임 이후 적어도 금융부문에서는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난 5월 초 퇴임한 윤 전 원장의 후임 인선 과정에서 이미 조짐이 보였다. 최흥식·김기식 전 원장이 조기 낙마하는 상황 속에서도 고집스럽게 개혁 성향 민간인사를 금감원장에 앉혔던 청와대는 이번에도 민간인사를 물색했다. 그러나 최종 후보자들에 대해 각각 금융위와 금감원이 반대하면서 인선이 3개월이나 지연된 것으로 알려진다. 청와대가 금융감독의 지향점과 조정 능력을 상실한 사이 그 빈틈을 결국 금융 기득권 세력인 모피아와 금융회사들이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정 원장의 개혁 역주행 시도가 과연 성공할까.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게 역사의 순리다. 사모펀드 사태를 계기로 시민들이 금융감독의 중요성을 각성한 만큼 그 시도가 호락호락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박현 경제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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