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숙 ㅣ그래픽노블 작가
고흥에 강연이 잡혔다. 오전에는 과역중학교에, 오후에는 점암중앙중학교에 가기로 했다.
고흥에서 태어나 6살까지 자랐다. 고향에 마지막으로 갔을 때가 2007년이었다. 그때만 해도 엄마는 약했지만 건강한 편이었다. 그새 아흔이 다 된 엄마는 허리를 두번이나 다쳤다. 무리를 해서라도 고향에 함께 내려가고 싶다는 엄마는 병원에 재활치료를 열심히 다녔다. 하지만 담당 의사는 장시간 차를 타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다. 포기해야 했던 엄마의 아쉬움만이 엄마 대신 나를 따라왔다.
당일, 새벽에 일어났지만 당근, 감자, 초코 아침 산책 시키고 밥 주니 시간이 금방 가버렸다. 급하게 집을 나오느라 세면도구 가방도 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나왔다. 송파에 사는 큰언니를 픽업하러 들렸다. 언니는 가다가 먹을 물, 과일, 과자, 빵, 오징어, 세면도구 하물며 우리가 사용할 수건까지 안 챙긴 것이 없었다.
도로가 새로 뚫렸다. 휴게소에서 쉬지 않고 간다면 고흥까지 4시간이면 갈 수 있을 것 같다. 점심은 광주나 순천에 가서 먹자고 내가 제안했다. 언니와 오빠는 고흥에 가서 먹자고 했다. 고속도로에서 빠졌다가 다시 고속도로를 타는 것은 시간이 꽤 소요된다고 했다.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고향에 가 있었다.
순천∼완주 고속도로를 달릴 즈음이었다. 산 넘어 산이고 또 산 넘어 산이었다. 그 풍경을 보던 내가 “첩첩산중이네. 조선시대 사람들 여기로 유배되면 진짜 벗어날 방법이 없었겠어. 과거 한번 보러 서울 가도 1년은 걸렸겠어. 그 시대에 안 태어난 게 얼마나 다행이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언니가 옛날 생각이 난다며 말했다.
“엄마가 서울 가면 너무 서글퍼. 서울에 갔다 온다고 하긴 했는디. 학교 갔다 옹게 엄마가 없어져븐 거야. 아이고 엄마가 저 산을 넘고 저 산을 넘어 또 저 산을 넘어갔구나. 엄마 있는 데를 갈라믄 산을 몇개를 넘어야 하까? 어디까지 갔으까? 눈물이 막 나와. 해 넘어갈 때쯤이면 더 서글퍼. 맨날 산을 쳐다보고 있었지.”
내가 물었다. “서울에는 삼촌 집에 계셨던 엄마의 엄마 보러 간 거야?”
“그렇지. 이모도 보고 할머니도 보고. 서울엘 가야지 또 돈이 생기니까.”
나는 궁금했다. “엄마 서울 가면 밥은 누가 해서 먹었어?”
“아부지가 아침밥은 해서 우리 먹여 학교 보내고. 저녁은 내가 집 뒤에 깻잎 뜯어다가 담가서 된장국 끓여서 아부지 밥 차려주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나는 아버지가 밥을 했다는 것에 놀랐다.
“아부지가 우리들 아침밥 해주는데 힘들었지. 견디다 못해 모룡에 농협인가 면사무소인가까지 엄마한테 전화하러 갔어. 빨리 오라고….”
우리는 대룡리에 살았다. “전화하러 모룡까지 갔다고?” 오빠가 언니 대신 대답했다. “그때는 전화기가 당최 귀한 시대였어.”
언니가 말을 이었다. “너는야, 한번은 엄마 따라 서울 갔다가 홍역에 걸려부렀어야. 데꼬 왔는데 오메오메. 아조 그냥 머리는 박박 깎어불고. 몸에 게딱지같이 벌겋게 두드러기가 막 나가지고. 네가 세살인가 묵었어. 너 그때 죽다 살어났어야. 아부지랑 나랑 니 둘째 언니는 논에 가서 일했는디 아부지가 집에 갔다 오더니 ‘니 엄마 왔다’ 그라데. 집에 달려갔더니 엄마가 우리 원피스 사 왔더라고. 서울 가서 옥수수 장사랑 막 했다데. 엄마가 한달 만에 왔응게.”
변하지 않은 것은 드물다. 아버지의 손으로 쌓아 올린 고향 집의 돌은 공장에서 찍어낸 회색 벽돌로 대체되었다. 엄마의 팥죽은 맛있다고 마을에서도 유명했다. 팥죽을 쑤면 마당 우물가에 식으라고 두었었다. 그 우물도 없었다. 바람 불고 비 오면 귀신처럼 울어대던 뒷동산 대나무 숲도 우리 집 뒤 큰 소나무도 베어졌다. 하긴 강화, 지금 사는 곳도 매일 작은 산이 깎이고 주택단지가 들어서는데 이곳도 안 변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고향만큼은 그대로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이 고향을 떠나온 사람의 마음인 것 같다.
과역중학교도 중앙중학교도 전교생이 서른명도 안 됐다. 봄이면 벚꽃이 휘날리던 중앙중학교의 벚나무들도 작년인가에 새로 길을 다듬으며 다 베어졌단다. 언니는 시멘트 길을 걸으며 고향 학교의 추억마저 베어졌다고 아쉬워했다.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나는 아이들 보기가 이렇게 어려워질 줄 상상도 못 했다. 담당 선생님이 내가 아이들이 사는 동네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주었나 보다.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얘들아, 시골에 산다고 기죽지 말고 꿈을 향해 씩씩하게 가.” 아이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