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응암로 한 커피전문점 드라이브스루 매장 공사 현장 앞 가로수 세그루가 갈변한 채 말라 죽어 있다. 구청 쪽은 누군가 고의로 가로수를 훼손한 것으로 판단해 목격자 제보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김양진ㅣ전국팀 기자
가서 보면 그냥 알게 된다. 누군가 독극물로 이 나무들을 죽였구나. 바르르 떨듯, 나무는 손아귀 같은 잎사귀를 말아 쥐고 있었다. 한여름 녹음을 뽐내는 주변 동료들과 달리 갈색으로 변한 가로수는 생명활동이 정지됐음을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오거리 인근 플라타너스 세그루 이야기다.
응암로는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은평구 녹번동을 잇는 왕복 6차선 도로다. 주변 건물 옥상에 올라가 바라보면, 이 도로는 2열 종대인 양옆 가로수의 호위를 받아 서울 서북지역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녹색 행렬 중간에 이빨이 빠진 듯, 홀로 삭풍이라도 맞은 듯 갈변한 나무들이 서 있다. 어른 손바닥 몇개를 합친 크기 나뭇잎들이 만들어준 그늘 아래에서 걸음을 옮기던 행인들도, 이 구간에서만큼은 손바닥을 들어 올려 따가운 햇볕을 직접 막아야 한다. 그늘 한점 못 만들어내게 된 죽은 가로수에는 ‘수사의뢰’ 표지판이 붙었고, 죽은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목격자를 찾습니다”라는 펼침막이 무심하게 내걸려 있었다.
“누군가 농약을 써서 고사시킨 게 명백합니다. 정도가 너무 심합니다.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입니다. 누가 그랬는지 의심이 가긴 하지만…, 이런 일이 또 일어나서야 되겠습니까. 보통은 그냥 톱으로 베는데 이렇게 잔인하게….”
현장에서 서대문구청 담당 공무원에게 연락했더니, 돌아오는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구청 의뢰로 전문기관이 나무 둥치의 목질을 떼어내 분석한 결과, 안전기준치의
700배가 넘는 고농도 농약이 검출됐다고 한다. 앞서 지난 6월 초 스타벅스 드라이브스루 매장이 들어서면서 건물주는 차량 진출입로 마련을 위해 구청 허가를 받아 두그루를 베어냈는데, 이때도 같은 방식이 사용됐다고 한다.
하필 베어진 바로 옆 두그루에서와 같은 농약 성분이 검출된 이유는 뭘까? 건물주는 펄쩍 뛴다. “나무가 있어야 건물 햇빛이 가려지는데 내가 왜 나무를 없애겠냐. 내가 가장 큰 피해자”라는 것이다.
지난 16일 ‘응암로 플라타너스 누가 죽였나’(<한겨레> 16일치 11면) 보도가 나간 뒤 여러 독자들이 기사 댓글 또는 전자우편으로 의견을 보내왔다. 가장 인상 깊은 건 ‘가로수가 불쌍하다’, ‘마음이 아프다’는 반응들이었다. 가로수를 물건이 아닌 생명체로 바라보고 있다는 얘기였다. 가로수는 훼손된 게 아니라 독살된 것이다.
지역 온라인커뮤니티 등에서는 ‘가로수를 그대로 두자’, ‘똑같은 가로수로 다시 심자’는 의견이 나왔고, 구청은 이를 수용했다. “범인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시민들에게 가로수 훼손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죽은 가로수는 당분간 존치될 예정이다. 또 나중에 가로수를 교체하더라도 주변 나무들처럼 성장한 나무를 심기로 했다.
사실 시나 구에 접수되는 가로수와 관련된 민원 대부분은 ‘베어달라’는 것이라고 한다. 성장한 가로수는 건물 간판이나 도로표지판 등을 가리기 때문이다. 이번에 독살된 플라타너스(양버즘나무)는 더욱 그렇다. 건물 3~4층 높이로 키도 큰데다, 큼지막한 나뭇잎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녹음이 우거지는 만큼 열섬 완화효과도 크다. 또 잎이 작은 다른 나무들보다 대기 중 탄소를 흡입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대기오염에도 강하다. 무엇보다 이 척박한 도심에 왕성한 푸르름, 싱그러움을 선사해준다. 매년 4월이면 작고 빨간 꽃이 촘촘하게 핀 방울꽃이 주렁주렁 달린다. 그래서 방울나무로도 불렸다.
당장에 가장 중요한 일은 범인을 잡는 것이리라. 경찰 수사가 속도를 냈으면 한다. 아울러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가로수를 다시 보고 대하는 문화가 널리 퍼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매년 봄 관행적으로 무자비하게 가로수 가지를 쳐내는 일부터 중단해보면 어떨까. 집·회사 근처 가로수의 이름을 확인하고, 잎·꽃·줄기 등을 관찰해보면 어떨까. 참고로 플라타너스의 꽃말은 ‘천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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