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철우|서울과학기술대 강사(과학기술학)
1만7000년 전 알래스카를 누비던 한 매머드의 짧은 삶이 실험실에서 복원됐다. 최근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실린 미국 매슈 울러 교수(알래스카 페어뱅크스대학) 연구진의 매머드 엄니(상아) 분석 논문은 마지막 빙하기에 살았던 어느 수컷 매머드의 일생을 보여준다. 연구진은 이 매머드에게 ‘킥’(Kik)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킥의 이야기가 복원되는 과정은 또한 연구자의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요즘 실험실의 능력을 한껏 보여준다. 연구진은 킥의 삶이 1.7m 길이 엄니에 빼곡히 기록돼 있으리라는 데 착안했다. 엄니는 나무의 나이테와 같다. 날마다 자라는 엄니의 뾰족한 끝은 킥의 잇몸에서 엄니가 처음 생긴 날의 기록이며 뿌리는 마지막 날 킥의 기록인 셈이다.
거기에는 킥이 평생 걸어온 여정이 담겼다. 엄니에 간직된 특정 원소들은 킥이 날마다 먹은 솔잎과 나뭇가지에서 온 것이고 그 식물은 지역마다 지문처럼 다른 동위원소 비율의 흙 속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매머드와 식물과 땅은 이렇게 연결되었다. 연구진은 엄니에서 스트론튬, 산소, 질소, 탄소 동위원소 변화를 추적해, 킥이 생을 마감하기까지 한반도 몇배나 되는 알래스카 일대를 끊임없이 걷고 걸었음을 밝혀냈다.
연구진은 지역마다 동위원소 비율이 다르게 나타나는 알래스카 지도를 작성하고, 고체 시료에서 동위원소를 직접 분석해내는 첨단 질량분석기를 이용해 엄니에서 무려 34만건의 분석 데이터를 얻어냈다. 아마도 연구의 태반은 반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는 보기 좋게 요약된 그래프와 지도로 논문에 실렸다.
그래프는 킥의 삶이다. 엄니의 동위원소 그래프에는 28번의 오르내림이 나타났다. 계절 변화를 나타내는 오르내림은 킥이 28살임을 말해준다. 킥은 2살 때 젖을 뗐다. 성장기에 킥은 계절에 따라 무리와 함께 이동하며 여러 지역의 식물을 먹었다. 그러던 중에 16살 때 큰 변화가 나타났다. 요즘 수컷 코끼리들처럼 다 자란 킥은 무리에서 벗어나 독립생활을 시작했을 것이다. 킥의 이동은 넓어졌고 자유로워졌다. 매머드 수명은 대략 60~80년이지만 킥의 엄니는 28살의 해에 성장을 멈추었다. 생을 마감하기 1년 반 전부터 질소 동위원소가 부쩍 늘었는데 킥이 심한 굶주림을 겪었음을 말해준다. 이동 반경은 크게 줄었다. 늦겨울 또는 초봄 무렵 킥은 1만7000년 뒤 엄니가 발굴된 바로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멸종한 매머드의 일생이 이처럼 자세히 복원된 것은 처음이라 킥의 이야기는 큰 관심을 불러 모은다. 그것이 과학자와 엄니 시료, 질량분석기, 컴퓨터, 데이터의 멋진 합작품임을 생각하면 킥의 이야기는 더욱 생동감 있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