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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노나메기’ 마음이면 되지 않겠니

등록 2021-08-25 13:48수정 2021-08-26 02:35

[엄마아들 귀농서신]

몸의 힘을 박박 긁어낼 때 흘리는 박땀, 안간땀, 피땀. 그렇게 흘린 땀만큼 서로서로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노나메기’란다. 농사란 게 그렇더라. 꾀를 내어서 땀을 덜 흘리고, 더 많은 열매가 돌아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는 애초 시작하면 안 되는 거지.

조금숙|괴산서 농사짓는 엄마

살갗으로 찬 바람이 전해지는 아침저녁이다. 갓밝이에 사뭇 가을 냄새가 나. 어느새 입추를 지나 처서도 지났구나. 더위가 한풀 꺾여 일하기가 좀 나을 때인데도 밭일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네. 지난주 참깨를 베어서 밭에 세워놓았다. 가을장마 전에 얼른 마당으로 끌어 올려야겠는데, 하필 이런 때 너희 아빠 허리를 삐끗했다. 나이가 점점 드는 건지 무섭기도 하고, 한결같이 밭일은 마음 같지 않네.

네가 대여섯살 무렵, 대구의 큰이모가 우리 살던 산본에 며칠 놀러 왔을 때야. 네가 대구에 가고 싶다고 하니까 이모가 나중에 겨울 되면 같이 가자고 했어. 지금은 더운 여름이지만 눈이 펑펑 오는 겨울이 오면 대구에 같이 놀러 가자고. 그리고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 네가 뜬금없이 창밖을 가리키며 얘기했지. “이모, 밖에 눈이 펑펑 오는데! 대구 가야겠다!” 그 이야기는 대구 이모가 너를 기억하는 방법이야. 먼저 귀농해서 살고 있는 큰이모에게 네가 조만간 귀농하려 한다는 말을 했더니, 말릴 생각일랑 말라며 돌려주는 이야기더구나.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기어코 하는, 넌 그런 아이라고.

무슨 일을 시작하면서 막막할 때, 한 가닥을 잡아 정리하다 보면 감나무에 연 걸리듯, 줄레줄레 잡히는 게 있을 거야. 일단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 네가 말한 기획서도 좋을 거 같아. 무슨 농사를 어떻게 지을지 먼저 고민해보는 거야. 건강하고 꼭 필요한 작물이 있으며, 어떤 성질의 땅이 있어야 하고, 농부가 해줘야 할 일이 뭘까 먼저 공부하는 거지. 그러다 보면 농부의 삶을 어렴풋이나마 배우게 될 거야. 꼭 지금 농사짓지 않더라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들이다. 작물 추천 정도야 해줄 수 있겠지만 그것 자체도 스스로 조사해서 고르는 편이 더 보람찰 거야.

혼자 끙끙거리기보다 먼저 고민한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려 한다니 반가워. 조금만 찾아봐도 농사 교육 프로그램은 많이 있을 거야. 이곳 괴산에도 몇군데 있단다. 한달 살기 프로그램도 있고, 청년귀농을 돕는 법인도 있어. 다만, 지금 네가 받고자 하는 교육이 체계적인 농사 방법이나 농산물로 상품 구성하는 방법뿐 아니라 농사에 대한 철학을 함께 배울 수 있는 곳이라니 더할 나위 없겠다. ‘유기농’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고되다. 특히 소농이 하는 유기농은 더 그렇지. 제초제를 멀리하고, 화학비료를 안 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땅을 살리는 농사’이며 생명농업이라는 믿음이 힘들고 고된 것을 이겨나갈 바탕이 될 거다.

너에게 바람이 들까 봐 따로 말한 적 없지만, 주변에 성공한 청년농부들도 적진 않다. 최근에야 알게 된 ㄱ은 농부 유튜버란다. 소소한 취미생활이나 되는 줄 알았는데, 아주 단순한 농산물 보관 방법만도 몇십만명이 찾아 본다니 깜짝 놀랐지. ㄱ은 초등학생인 아이들과 함께 살아. 꼭 도시에서 학교를 다닐 필요 없다고 판단하고 미련 없이 귀농을 결정했다더라. 그 친구 남편은 인근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귀농 5년 만에 직장을 접고 함께 농사를 짓고 있단다. 속속들이 안다고는 못 하지만, 인터넷을 활용한 뛰어난 판매 실적을 가늠해본다. 괴산에서 유명한 청년농부 ㄴ도 있다. 아버지와 사과 농사를 같이 하면서 괴산에서 제일 먼저 사과 ‘브랜드’를 만들었어. 농촌에서 보기 드물게 상품디자인에 거금(?)을 투자해서 만든 매끈한 사과 브랜드야. 그 얼마간은 괴산에서 하는 크고 작은 모임 어디에서든 그의 브랜드 이야기를 하곤 했단다. 온라인에서 인기몰이를 하면서 명성을 단단히 했지.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지역 신문을 통해 알게 된 농부 ㄷ도 있어. 30대 부부인데 도시에서 맞벌이를 하다가 이제는 괴산에서 표고버섯 농사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이렇게 자리를 다져가는 청년농부들도 많다. 내가 그 나이였다면 이렇게 도전해볼 마음이 들까. 내가 너의 나이였다면 그럴 수 있을까. 가끔 너의 도전이 새삼 대견하기도, 또 부럽기도 해. 물론 네가 저런 선배들처럼 잘되리란 보장은 없지만,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있는 건 또 아니니까. 그 뒷면에 반드시 땀과 정성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지.

노나메기 정신이라고 들어봤니. 온몸의 힘을 박박 긁어낼 때 흘리는 박땀, 안간땀, 피땀. 그렇게 흘린 땀만큼 서로서로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노나메기’란다. 농사란 게 그렇더라. 꾀를 내어서 땀을 덜 흘리고, 더 많은 열매가 돌아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는 애초 시작하면 안 되는 거지. 박땀 흘려가는 농부들을 보면서 ‘나 혼자 뻔뻔치가 되면 안 되겠다’ 매일같이 다짐해. 농부가 되고자 하는 아들이 먼저 노나메기 정신을 익히고 왔으면 좋겠다 싶어. 어렵고, 힘들더라도 남의 것에 부러워하기보다 기꺼이 땀 흘리고자 하는 마음은 꼭 익혀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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