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무영 | 시골로 가려는 아들·로스쿨 졸업
벌써 고추 수확철이네요. 어머니 아버지 힘에 부치시진 않을까 걱정됩니다. 밭에서 몇번이나 앉았다 일어서야 할까요. 고추가 줄 맞춰 매달려 있을 리 없으니 매번 앉는 깊이도, 무릎 각도도 달라져야겠죠. 베어놓은 참깨는 외발 수레에 싣고 올려놓으셨겠어요. 밭고랑 사이를 외발 수레로 휘젓고 다니다 보면 허리 근육이 어디에 어떻게 붙어 있는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힘들던데. 높이 솟은 아로니아 가지를 쳐줄 적에 얼마나 어깨가 무거우셨을까. 밭일을 하고 있자면, 농부는 도대체 얼마나 튼튼해야 하는 건가 싶습니다.
아버지 허리를 삐끗하셨다고요. 일년여 전에도, 두어달 전에도 아버지 허리 다치셔서 고생하셨는데 걱정이 큽니다. 어머니 무릎도 걱정이에요. 얼마 전 괴산에 갔을 때 식탁 옆에 있는 관절영양제를 보고 ‘세월’을 느꼈어요. 생전 영양제 같은 건 관심 없으시던 어머니가 얼마나 무릎이 아프시면 찾아 드셨을까. 운동 챙겨 하시고, 식단 관리도 하시는 모습을 보고 막연히 ‘괜찮겠거니' 했네요.
언젠가 누나랑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있어요. 이제 우리 부모님이 옛날 같았으면 운전하지 말라는 소리 들으실 정도로 나이를 드셨다고. 요새야 워낙에 오래들 사시고, 좋아져서 옛날 같지는 않지만 벌써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를 했죠. 누나와 함께 괴산에 가면 엄마는 아빠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라며 누나 옆구리를 찌르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차로 함께 오시는 길에는 바리바리 반찬을 싸 가지고 오셔서, 냉장고 정리까지 싹 해주시고 가셨죠. 싸다 주신 반찬 차려놓고 먹을 때, 누나와 나눈 이야기일 겁니다. 이제는 아무리 괜찮다고 하셔도 우리 엄마 아빠한테 부담스러울지도 모르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넷플릭스 시리즈 <프랭키와 그레이스>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함께 살게 된 두 노인의 이야기예요. 한번은 두 노인이 모두 거실 바닥에 누워버렸습니다. 허리를 삐끗한 프랭키를 그레이스가 일으켜주려다가 둘 모두 허리를 삐끗해 그냥 드러눕게 됐죠. 둘은 함께 사업을 하고자 하는데, 그날 오후에 투자자 미팅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가고 싶어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못 가겠다며 취소하자고 해요. 그래서 전화기를 향한 뒤집힌 거북이들의 경주가 시작되었죠. 서로 드러누운 채로 밀고 당기고 합니다. 그렇게 미팅에 가고자 하던 그레이스가 먼저 전화기를 잡아채요. “내가 이겼어!” 그러고 한참 있다 울먹이며 말합니다. “나 정말 왜 이 모양이니. 바닥서 벌벌 기면서 사업은 무슨 사업… 어느새 이렇게 늙었다. 어렸을 적 뒤뜰에 큰 떡갈나무가 있었지. 다른 애들보다 훨씬 빨리 나무를 탔어. 그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치들 내려다보는 기분이 정말 좋았지. 그 위에 서면 못 할 게 없는 기분이었거든. 내 마음은 지금도 그날의 소녀 같은데, 하루가 멀다고 이 몸뚱이는 나이를 먹고 있네. 매일같이 몸은 나한테 나이를 먹고 있다고 말해줬는데, 오늘 처음 그 말을 들은 기분이야.” 프랭키가 대답합니다. “그 소녀 어디 안 갔어. 내 눈엔 보여. 씩씩거리며 구박하는 모양새며, 전화기 잡으려고 안간힘 쓰는 모습에서도 보인다고. 지금도 그때처럼 나무를 타잖아. 나무가 다른 걸로 바뀌었을 뿐이지.”
예전의 어머니 모습이 생각납니다. 수리산 자락에 쓰레기소각장이 들어선다고 할 때며, 멀쩡한 초목 베어서 철쭉동산 만든다 할 때도 가만히 있지 않으셨죠. 뜨거운 마음으로 환경운동을 하신 덕에 20년이 지난 지금도 어디 가면 ‘조금숙이 아들’로 불립니다. 쓰레기 종량제나 음식물 분리수거나 어머니께서 활동하신 부분에서 성과를 거둔 것도 많죠. “집에 엄마가 없어서 미안하다”고 늘 말씀하셨지만, 그때 어머니의 눈매에 불씨가 아른거렸습니다. 요새 부쩍 여기저기 아프셔서, 제가 너무 늦게 가는 건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어머니 눈빛은 여전하십니다. 활동가에서 농부로 거듭나시는 중이죠. 자치 활동으로 할머님들께 한글 가르치시고, 노래교실도 하시고요. 최근엔 성평등 강사 교육도 받으시잖아요. 괴산에 가신 이후로도 눈매에 불씨가 있습니다. 백기완 선생님의 소설 <버선발 이야기>에 어머니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 있더군요. “엄마의 눈매에 느닷없이 불씨가 일더니만 무지무지 얼음덩어리를 다 녹이셨다.” 십년 전, 도시의 삶을 내려놓고 과감히 시골로 거처를 옮기셨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는 도전은 대개 한번조차 어려운 일인데, 어머니는 얼마나 많은 도전을 하셨는지요. 시골에 가시게 된 게 온전히 어머니의 선택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장소 불문하고 자기 뜻을 펼치시는 모습을 보며 많이 배웁니다. 힘에 부치시는 일이 있다면, 제가 곁에서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끊임없는 어머니의 도전을 응원하면서, 또 어머니의 새로운 도전을 기다립니다. “그 소녀 어디 안 갔어. 내 눈엔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