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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팬덤은 책임지지 않는다 / 이세영

등록 2021-09-07 17:44수정 2021-09-08 02:33

더불어민주당 권리당원 모임 회원들이 6월4일 오후 국회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 경선 연기를 촉구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더불어민주당 권리당원 모임 회원들이 6월4일 오후 국회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 경선 연기를 촉구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세영 논설위원

“들어본 적 없다.”

‘대통령이 검찰개혁 속도 조절을 주문하지 않았냐’는 방송 진행자의 물음 앞에서 민주당 ‘수사기소권분리 티에프(TF)’ 팀장 박주민 의원의 답변은 단호했다. 검찰개혁을 둘러싼 여권 기류가 ‘수사권 완전박탈론’과 ‘속도 조절론’으로 갈렸던 지난 2월의 일이다. 누가 봐도 ‘속도 조절 당부’로 읽히는 문재인 대통령 발언(“변동된 수사 체제를 안착시키는 노력이 중요하다”)이 여러 경로로 전달된 직후였다는 점에서 ‘강성 친문’ 재선 의원의 한마디는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당-청의 이상 기류는 민주당이 언론중재법 개정안 처리를 시도한 지난달 말에도 감지됐다. 청와대가 법안에 대한 우려를 당 지도부에 전한 사실이 확인됐지만, ‘문재인 1기’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김영배 의원은 방송에서 “청와대가 이래라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다”라며 과감하게 선을 그었다.

물론 역대 정권의 임기 말을 떠올리면, 대통령 뜻이 여당 안에서 ‘씹히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은 아니다. 퇴임이 가까워질수록 ‘절대군주’에 비견되던 초반 위세가 ‘입헌군주’를 거쳐 ‘상징군주’의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이 ‘제왕적 대통령들’의 한결같은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과 앞선 정권들의 임기 말에선 차이가 뚜렷하다. 청와대 의중을 공공연히 거스르는 주체가 ‘친위 그룹’을 자처해온 내부자들이란 사실이다.

최근 언론중재법 직권 상정을 거부한 국회의장 이름 뒤에 욕설로 짐작되는 영문 이니셜을 붙여 페이스북에 올린 김승원 의원 역시 박주민 의원이 좌장인 강경파 초재선 모임 소속이다. ‘대통령을 지키고 개혁을 완수하겠다’며 뭉친 친위 그룹이 대통령 뜻에 배치되는 언행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이 난감한 풍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눈여겨볼 대목은 논란의 당사자들 모두 에스엔에스 활동으로 대통령의 팬덤과 수시로 소통한다는 사실이다. 팬덤의 핵심 관심사인 검찰·언론개혁의 운명이 걸린 상황이라면 소통의 성실함과 집요함도 더해진다. 글이 오르기 무섭게 ‘좋아요’와 지지 댓글이 수백건씩 줄을 잇는 상황이니, 중진과 지도부는 물론 대선주자들조차 이들 눈치를 살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일부에선 팬덤과 강경파에 좌우되는 집권세력의 정치 행태를 ‘파시즘’으로 규정하지만 과도해 보인다. 적정 수위를 넘어선 ‘지도자 숭배’와 ‘희생자 의식’ ‘정치적 공격성’ 같은 행동 양태는 ‘역사적 파시즘’보다는 ‘팬덤 정치’ 일반의 특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집권세력의 의사 결정에서 나타나는 도착과 전치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는 파시즘 비판자들이 애용하는 로버트 팩스턴보다, 전전(戰前) 일본의 통치 메커니즘을 해부한 마루야마 마사오의 분석틀이 유용할 듯하다.

마루야마가 볼 때, 팽창기 일본의 대외정책에서 극단 노선을 주도한 것은 내각과 군부의 고위층이 아니라, 정권 주변의 우파 낭인과 강경 지지 세력에 연결된 중간 실무자, 하급 장교 그룹이었다. 내각과 군의 수뇌부가 통치에 필요한 권위를 오직 ‘절대적 가치의 중심’인 최고 지도자(천황)로부터의 물리적·감각적 근접성에 의존했던 까닭에, 책임정치에 수반되는 자발성과 책임의식을 이들에게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 정부 들어 두드러진 팬덤 정치의 작동 구조 역시 상술한 메커니즘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서 문재인 대통령으로 승계된 ‘절대적 권위’를 중심축 삼아 권력이 동심원을 그리며 분배되는 위계 구조 속에서, 각 단계의 권력 주체들은 정당성의 원천을 ‘내부’에 갖기보다 ‘중심으로부터의 거리’에 의존하게 된다. 중심의 권위가 약해질수록 상층의 의사 결정이 ‘하부로부터의 압력’에 취약해지는 구조다. 임기 말이 다가올수록 팬덤과 밀착도가 높은 중하위 그룹이 ‘개혁 완수’와 ‘대통령 수호’를 명분으로 내부 의사 결정을 주도하게 되는 배경이다.

문제는 잘못된 결정의 책임을 묻는 것이 이 구조 아래선 난망해진다는 점이다. 지도부는 자신들을 압박한 소장 그룹에, 소장 그룹은 다시 강성 팬덤에 책임을 미룬다. 그러나 ‘익명의 다수’는 책임질 수 없고, 책임을 이양할 대상도 없다. 그 결과 목격하게 되는 것은 누구도 결정에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의 난장’이다. 이것이 ‘촛불의 열망’ 위에 들어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의 모습이라면, 너무도 허무하지 않은가.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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