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 | 논설위원
지난해 김진욱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처장의 임기 만료가 가시화될 무렵 공수처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수장 공백’ 사태였다. 검찰총장 때부터 공수처를 탐탁지 않게 여긴 윤석열 대통령이 공수처장을 공석으로 놔둘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공수처를 없앨 수는 없으니, 공수처장을 임명하지 않는 방법으로 힘을 빼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공수처는 ‘수장 공백’보다 더한 위기에 직면했다. 정부와 여당이 공수처를 아예 ‘접수’하려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 추천위원들은 지난 대선 때 윤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인사를 공수처장 후보로 집요하게 밀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최근까지 6차례 회의를 연 공수처장 후보 추천위원회는 최종 후보군 2명 가운데 1명을 일찌감치 뽑아놓고도 나머지 1명을 확정하지 못해 공수처장 공백 사태를 초래하고 있다. 추천위는 여당과 야당이 각각 2명씩 추천한 위원 4명과, 당연직 위원인 법원행정처장, 법무부 장관, 대한변호사협회 협회장 등 7명으로 구성된다. 후보 추천위는 각자 추천한 후보들 가운데 5표 이상의 동의를 받은 2명을 최종 후보로 선정해 대통령에게 추천하고, 대통령은 이 가운데 1명을 공수처장에 임명한다. 추천위원 7명 가운데 5표 이상의 동의를 받도록 한 것은 공수처의 정치적 중립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공수처는 대통령을 포함해 거의 모든 고위공직자를 수사하기 때문에 정치적 중립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 추천위원들이 각자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최대한 합의를 통해 최종 후보를 뽑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권 추천위원들은 이런 ‘합의 정신’을 무시하고 있다. 이미 최종 후보로 뽑힌 오동운 변호사가 여권에서 추천된 후보인데도 나머지 1명까지 자기들이 밀고 있는 후보로 뽑겠다고 생떼를 쓴다. 하지만 이들이 미는 김태규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은 공수처장이 되기엔 너무나 함량 미달이다. 그는 판사 시절 공수처를 ‘통제 불가능한 괴물’ ‘형사사법 절차 안의 이질분자’라고 맹비난했다. 또 변호사 개업 후에는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면서 “국가 원수를 시해하는 것을 반역이라 볼 수 없다”는 막말까지 했다. 공수처장은커녕 법조인으로서의 자질이 의심된다.
그동안 추천위 회의에서 김 부위원장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진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과 김영훈 변협회장도 마찬가지다. 공수처를 생겨나선 안 될 기관으로 인식하는 사람을 공수처장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셈인데, 공수처를 없애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도무지 설명이 안 된다. 김 변협회장의 태도는 더욱 기가 막힌다. 애초 변협은 검찰 출신이 적임자라는 판단에 따라 3명의 검찰 출신 변호사를 추천했다. 그런데 변협이 추천한 후보들이 초반 탈락했다는 이유로 판사 출신인 김 부위원장 지지로 바꿨다고 한다. 하지만 남은 후보 가운데 김 부위원장과 동률(4표)을 기록한 이혁 변호사가 바로 검찰 출신이다. 변협의 애초 취지대로라면 김 변협회장은 이 변호사를 지지해야 맞는 게 아닌가. 이미 뽑힌 오동운 변호사도 판사 출신이다. 김 변협회장에게 직접 물었더니, “회의 내용은 비공개”라며 답을 피했다. 참 궁색하다. ‘변심’한 이유를 밝히라고 했지, 누가 회의 내용을 공개하라고 했나. 문재인 정부 때 초대 공수처장 최종 후보는 판사(김진욱 공수처장)와 검사 출신이 각각 1명씩이었다. 모두 변협에서 추천한 인사였다. 당시 이찬희 변협회장은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 수사능력, 리더십과 책임감 등이 골고루 고려됐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여권 추천위원들의 ‘오버’는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다. 윤 대통령이 공수처에 약점을 잡힐까봐 자기 말을 잘 듣는 공수처장을 임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공수처는 지난해 9월부터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고발한 ‘해병대 수사 외압’ 의혹을 수사하고 있다. 박 전 대령 쪽은 채아무개 상병 사망 사건 수사에 외압을 행사한 ‘윗선’으로 사실상 윤 대통령을 지목했다. 여기에다 최근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도 공수처에 접수됐다. 윤 대통령 부부는 나란히 청탁금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발된 상태다. 대통령은 임기 중 형사 소추(기소)를 당하지 않아서 당장 윤 대통령이 화를 입지는 않는다. 하지만 임기 동안 공소시효도 정지되기 때문에 공수처가 수사를 제대로 진행한다면 윤 대통령은 퇴임 후에 기소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여권 추천위원들이 계속 김 부위원장을 고집한다면 더 이상 ‘오해’로 남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