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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이야기

등록 2021-09-08 18:33수정 2021-09-09 02:32

근 4, 5년 전부터 이상한 날씨들을 피부로 절감하고 있다. 섭씨 35도를 넘나드는 이상 고온이 열흘이나 계속되어 아로니아 열매가 나무에 달린 채 말랐던 해가 있었다. 작년에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54일간 비가 내렸다. 밭에 심었던 들깨가 한 포기도 남지 않고 녹아버렸단다. 하늘에 기대어 농사짓는 농부는 이상 기온에 노심초사 애를 태우곤 한다.

[엄마아들 귀농서신] 조금숙|괴산서 농사짓는 엄마

가을이 성큼 마당으로 들어왔다. 뒤늦게 달린 방울토마토의 붉은빛이 언뜻언뜻 보이고, 뒹굴고 있는 늙은 호박은 누런색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는구나. 꽃무릇이 이제야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며칠 전 빗소리에 잠이 깼다. 가을장마라더니 거칠고 세찬 소리는 나이 많은 반려견 ‘얼이’를 낑낑대게 한다. 데크 위 차양을 뚫어버릴 기세다. 근 4, 5년 전부터 이상한 날씨들을 피부로 절감하고 있다. 섭씨 35도를 넘나드는 이상 고온이 열흘이나 계속되어 아로니아 열매가 나무에 달린 채 말랐던 해가 있었다. 작년에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54일간 비가 내렸다. 어찌나 오래 오던지 달력에 찍어가며 세어봤어. 그렇게 밭에 심었던 들깨가 한 포기도 남지 않고 녹아버렸단다. 동네 사람을 마주치면 이게 바로 아열대 기후 아니냐고 입을 모았다. 하늘에 기대어 농사짓는 농부는 이상 기온에 노심초사 애를 태우곤 한다. ‘지구온난화’를 20년 전부터 들어왔고 그때, 할 수 있는 걸 찾아보기로 생각했어. 그때부터 엄마의 머리는 쇼트커트가 되었단다. 세제도 물도 덜 쓰기 위해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거든. 하나둘, 생활 습관을 익히던 중에 아파트 분양이 당첨되어 산본으로 이사를 했지. 10월부터 입주를 시작했지만 우리 집은 네 누나 방학하는 날에 맞춰 12월에 이사를 했다. 네 나이 네살이었지. 5층 아파트의 3층에 살다가 25층 아파트의 14층으로 이사하니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시간이 꽤나 길게 느껴지더구나. 입주자들 모두 서먹서먹했지. 그래서 엘리베이터에 방을 부쳤다. “1402호인데요. 차 한잔 하실래요?” 그날, 집에 있는 모든 잔이 다 나와야 했다. 그 일을 계기로 라인반장을 떠맡게 되었다. 그즈음, 길거리 현수막에서 ‘시민주주를 모십니다’라는 안내에 지역신문사를 찾아갔고 기꺼이 작은 후원을 시작했다. 지역의 현안이 심각한 만큼 생활실천단 모임을 작게나마 다시 시작했다.

그러다 수리산을 밀어서 소각장을 착공한다는 소식을 들었어. 군포에는 소각장 건립 반대 운동이 일었다. 처음엔 그저 머릿수 하나 채워준다는 마음이었지. 네살 먹은 아이 손 잡고 참석하기 시작했어. 소각장 건립 반대 운동은 우리가 쓰레기를 줄일 테니 소각장은 필요없다는 주장이 함께였다. 지역신문사의 생활실천단 모임에서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서 배출되는 쓰레기 중량을 기록하는 일부터 했어. 분리수거한 쓰레기를 종이는 종이대로, 플라스틱 따로, 병, 고철을 분리해서 일주일 간격으로 중량을 기록하여 한달간 얼마만큼의 쓰레기가 배출되는지 통계를 냈단다. 또한 젖은 쓰레기를 태울 때 독소가 나온다고 해서 물기가 있는 음식물쓰레기 분리배출을 시도했다. 무엇이든 간에 처음 실시할 때는 준비할 것도 많고 시행착오도 겪기 마련이지. 음식물 분리수거 시범단지를 만들어내고 다른 단지도 함께 하기 위해서 아파트 부녀회나 동대표회를 찾아다니며 설명회를 했다. 모아진 음식물쓰레기를 활용할 수 있는 사료공장을 찾아 멀리까지 견학을 가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네가 말한 작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 시 전체가 음식물 분리수거를 시작하게 했으니까. 해야 되는 일이라고 판단했으니, 그 일을 내가 먼저 시작해보고 널리 알리는 것이 내 역할이라 생각했다. 흔히 말하는 환경운동이었지. 엄마는 ‘소각장통’으로 불리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아파트 주민들을 만날 때마다 소각장이 어떻게 되는지 질문을 받곤 했어. 남들은 궁금하기는 하지만 하고 싶지 않은 일, 그 일을 왜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 참, 옛날 일이다.

사설이 길었다. 네 얘기에 가슴이 먹먹해져 한참을 옛 생각에 빠져 있었네. 오늘 너의 응원에 기대어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구나. 요새 뉴스 보기가 마뜩지 않다. 누군가의 아내와 딸을 대상으로 하는 판결이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는구나. ‘왜 분노하지 않는가’라고 말한 존 커크 보이드가 자꾸 떠오른다.

괴산에 사는 일개 농부는 ‘사법정의’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너의 편지를 보기 전까지 참 주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옛날 생각을 해보니, 그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산본에 사는 한낱 애엄마였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둘 찾아 실천하다 보니 어느새 환경운동을 하고 있었지. 나이가 많이 먹었다고 그저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할까. 뭘 할 수 있을지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야. 처음에 네가 시골에 온다고 할 때, 시골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막연히 생각했었어. 그런데 널 보며 다시 배웠다.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비 젖은 길에 홀로 켜져 있는 가로등을 보며, 엄마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 한다.

붉은 고추가 마지막 빛을 더해가고 있다.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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