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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깨진 유리잔과 인간의 깊이

등록 2021-11-04 16:10수정 2021-11-06 16:24

[삶의 창] 이명석|문화비평가

구부러진 비탈길을 내려오는데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은행이라도 주워 가시는 건가? 옆을 지나치며 흘깃 보는데 작고 반짝이는 걸 주워 담고 있었다. 동전이라도 쏟아졌나? 아니면 목걸이 줄이 풀려 진주알이 떨어졌나? 옆에 놓인 찢어진 종이 가방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같은 빛깔, 같은 재질의 깨진 유리잔들이 들어 있었다.

도와드릴까 싶어 발을 멈추니 할머니는 급히 내게 등을 지고 앉았다. 자신의 실수가 부끄러운 듯 모른 척 지나가 주길 바라는 듯했다. 나는 발을 옮겨 원래의 목적지인 조각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작품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꾸 아까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도와드렸어야 했나?

분명 흔한 물건은 아니었다. 꿀이나 호박 빛깔의 두툼한 유리잔으로, 장식용으로 쓰는 귀한 생김새였다. 선물로 받아 기쁜 마음으로 들고 오는데 가방끈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그 자체로 큰 상심이다. 그런데 깨진 조각들을 그냥 내팽개치고 가버릴 수도 없다. 하는 수 없이 유리 조각들을 주워 담는데 하나하나 자책의 가시가 되어 마음을 찌르고 있으리라.

나는 그릇을 잘 깬다. 원래 수전증도 좀 있는데다가 요즘 들어 시력이 약해져서 그런 것도 같다. 가장 괴로운 상황은 요리를 가득 담아서 손님이 기다리는 식탁에 들고 가다 와장창 깨버렸을 때다. 몇 시간의 요리가 헛수고가 된 것도 물론 괴롭다. 하지만 먹지도 못하는 음식을 깨진 접시와 분리해서 치워야 하는 일, 그리고 그런 꼴을 남들 앞에 보이는 게 훨씬 더 고통스럽다. “모두 나가 주세요.” 손님들을 쫓아내고 싶을 정도다.

살다 보면 이와 비슷한 경우를 겪기 마련이다. 사업이든 이벤트든 일을 벌였다가 처참하게 망해 버렸는데 그 뒤처리를 구질구질하게 이어가야 하는 때가. 망한 일일수록 수습할 서류도 많고, 죄송하다며 연락해야 할 사람도 많고, 치워야 할 쓰레기도 많다. 그러니 그때야말로 나라는 인간의 깊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9회초 3점의 리드를 안고 올라온 마무리 투수가 만루홈런을 맞고 승리를 날렸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완전히 넋이 나가 계속 얻어맞고 그 이닝도 마무리 못 하는 투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 남은 아웃 카운트를 정리하고 9회말의 역전을 기대하게 하는 투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지난 몇년간 많은 단골 가게가 문을 닫았다. 대부분은 미리 안내문을 내걸고 벼룩시장이라도 열어 물건을 정리하며 인사를 나눈다. 하지만 고객들이 포인트나 쿠폰을 처리하려고 올까 봐, 기약 없는 임시휴업 공지만 붙이고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거래하던 회사들이 부도가 나서 폐업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그래도 사죄의 편지를 보내고 다른 방식으로라도 보상하려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작정하고 빚을 더 내서 외국으로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아주 잘 기억한다. 그들이 다음에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때, 꼭 응분의 대가를 돌려준다.

갤러리를 돌다 옥상으로 올라가니 아까의 비탈길이 내려다보였다. 할머니는 허리를 두드리며 편의점에서 산 테이프로 종이 가방을 붙이고 있었고, 옆 건물에서 나온 듯한 할아버지가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있었다. 석양에 반짝이는 유리 가루들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팔팔한 몸으로 인생의 언덕을 오를 때보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불완전한 집중력으로 비탈을 내려올 때, 실수하고 실패할 가능성이 더 많겠구나. 누구에게나 그런 때는 온다. 그러니 실수를 줄이는 연습만큼, 실패를 책임지고 주워 담는 연습도 필요할 것 같다. 깨진 유리잔엔 물을 담을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깊이는 담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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