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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취소 버튼이 없는 세계

등록 2023-06-22 19:11수정 2023-06-23 02:38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삶의 창] 이명석 | 문화비평가

난생 처음 오일 파스텔을 배우러 갔다. 왕초보 강좌라 인쇄된 밑그림에 맞춰 색만 채우면 된단다. 이거 껌이네. 마음에 드는 색을 골라 신나게 쓱 그었다. 그런데 망했다. 내가 안절부절못하며 종이를 뒤적이자 친구가 물었다. “뭘 찾아?” “취소 버튼 어디 있지?”

얼마 뒤 전통 자수를 배우러 갔다. 고질적 수전증에 시력 저하까지 겹쳐 밑그림에 바늘을 꽂기도 어려웠다. 낑낑대며 꽃잎 하나 수놓았는데, 듬성듬성 탈모에 시달리는 바코드 머리가 돼버렸다. 어떡하지? 여기도 취소 버튼이 없을 텐데. 보조강사가 다가와 빈자리를 채우는 법을 알려줬다.

“역시 전문가는 다르시네요.” 실수하지 않는 것도 실력이지만, 실수했을 때 바로 고칠 수 있는 것도 큰 실력이다. 보조강사는 겸손하게 말했다. “저도 처음엔 야단 많이 맞았어요.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가 무섭죠. 뜯어! 그런데 더 무서운 말이 있어요. 버려!”

뜨끔했다. 내가 글쓰기 가르칠 때를 보는 듯했다. 글쓰기에서 일필휘지는 망상. 고치고 고쳐야 진짜 글이 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조금만 뜯고 뒤집으면 훨씬 살아날 글을, 수강생들은 쉽게 손대지 못한다. 그런데 내가 초보 처지가 돼보니 알겠다. 아직 솜씨가 서투니 그 소박한 작업물을 만드는 데도 엄청난 노고가 필요하고, 그 과정을 다시 할 엄두가 나지 않는 거다.

약간의 요령이 생겼을 때 위험이 찾아온다. 나는 바느질이 좀 잘못됐다 싶어도 도와달라는 말을 안 하고 이어갔다. 다 한 뒤에 살짝 수정하면 되겠지. 보조강사가 옆에 오자 숨기기까지 했다. 그러다 절반쯤하고 나서 깨달았다. 이미 ‘뜯어’의 단계도 지나가 버렸구나. 이제는 스스로 외쳐야 한다. 버려!

오랫동안 모니터 앞에 앉아 ‘Ctrl+Z’가 가능한 일들을 해왔기에, 이런 경험이 더욱 당혹스러웠다. 나만이 아니라 요즘 많은 사람이 목공, 도예, 자수, 자개 등에 이끌리는 이유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을 만드는 데 큰 만족감을 얻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취소 버튼이 없는 세계의 불편함을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실제 삶도 이쪽에 가깝다.

취업하고, 가게 차리고, 이삿짐 옮길 때 우리는 취소 버튼을 누를 수 없다. “왜 안돼? 그냥 새로 시작하면 되잖아.” 물론 그런 마음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미 써버린 비용은 되돌릴 수 없다. 예전에 수채화를 배울 때, 조금 잘못됐다 싶으면 쉽게 버리고 새로 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망친 그림이라도 최대한 살려보려고 애썼다. 왜? 종이가 아까워서. 이제는 그게 틀렸다는 걸 알지만, 어릴 때부터 몸에 붙은 습성이라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청춘은 도전이다. 실패에서 배워라.’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쉽겠지. “못할수록 재료는 제일 좋은 걸 써야 해. 그리고 절대 아끼지 마.” 지갑을 여는 부모. “식당 해보고 싶다고? 우리 건물 중에 빈 데가 있을 텐데.” 전화 돌리는 삼촌. “유학비용 아깝다고 생각하지 마. 힘들 땐 찾아오고.” 듬직한 아빠 친구. “학자금, 청년창업자금은 천천히 갚으셔도 돼요. 이자 걱정도 말고요”라는 정부.

그렇지 않은 세상의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중 하나는 작은 취미 속에서 실패와 수습을 반복해 보는 것이다. 원목 탁자를 만든다고 전기드릴로 나사를 돌렸다가 통째로 쪼개버린 경험이 삶에 무슨 도움이 될까? 적절한 ‘뜯어’와 ‘버려’의 감각. 포기할 때와 이어갈 때를 판단하는 훈련. 때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시간을 아낀다는 경험. 인적 경제적 자산이 없을 때는 이런 마음의 자산이라도 키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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