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모여서 이야기 나눠보면, 탄소배출량이니 그레타 툰베리니 귀농이니 그런 건 다른 나라 이야기입니다. 만나서 집, 코인, 주식, 부동산, 승진, 이직 이야기하면 헤어질 시간입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친구들이지만서도, 친구들이 좀 더 여유로웠다면 달랐을 것 같습니다. 언제쯤 그렇게 될까요.
[엄마아들 귀농서신] 선무영|시골로 가려는 아들·로스쿨 졸업
가까운 유적지, 이기조 선생 묘 근처에 때아닌 민들레가 피었습니다. 너무 여기저기에 피어 있어서 제가 꽃 때를 잘못 알고 있나 찾아보기까지 했어요. 가까운 철쭉동산에 철쭉도 군데군데 피어 있어요. 겨울처럼 추웠다가 곧 따뜻해져서 그런지 꼭 봄인 줄 알았나 봅니다. 나무들은, 꽃들은 어려움 속에서라도, 언제 꽃을 피워야 하는지 잘 알아서 해내는 줄만 알았는데. 저 때문에, 우리 때문에 더 이상 그러지 못하는가 봅니다. 이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딨으며, 아프지 않은 청춘이 어딨냐는 말이 그만큼 더 무색해졌네요. 어떤 꽃은 때를 잘못 만나 피자마자 지기도 하고, 제대로 피어나지도 못합니다. 청춘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때를 잘못 만나기도 하고, 아프다 못해 무너지기까지 하겠죠. ‘청춘이, 젊음이란 게 그런 거다'라는 말, 위로는커녕 울화만 납니다.
11월2일. 그레타 툰베리에게 메일을 하나 받았습니다. “기후위기를 멈출 가능성이 점점 적어지고 있습니다”로 시작하는데, 영국 글래스고에 있는 각국 정상들에게 심각성을 보여주기 위한 서명운동에 참여해달라는 내용이에요. 안타깝지만 이런 절실한 호소 속에서도 어떤 청춘들은 환경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툰베리는 여유 있는 집안에 태어나서 별다른 걱정 없이, 한가히 지구나 걱정한다는 수군거림을 듣기도 했어요. 요새 젊은이들 어떻다는 이야기는 참아주세요. 먹고살기 바쁜 청춘들은 철 모르고 핀 민들레 볼 새도 없습니다. 제 오랜 친구들이 보기에 툰베리나 저나 팔자 좋아 보이는 건 매한가지라 합니다.
먼저 결혼한 친구 하나는 벌써 ‘아빠'예요.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얼굴 보기가 힘듭니다. 회사 근처에 근사한 아파트도 마련했다 해요. ‘영끌' 해서 산 아파트 때문에 한시라도 일을 놓을 수 없습니다. 아이는 커가고 둘째도 곧 가질 계획이래요. 다행히 잘 버는 친구입니다. 예전부터 얼른 취직하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가정적인 남편으로 살고 싶어 했습니다. 꿈꾸던 대로 살고 있는 친구를 보면 저런 삶도 좋겠다 싶은데, 만나기만 하면 어서 일을 그만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시골로 내려갈 마음은 없다며 선을 긋습니다. 더 큰 집, 더 큰 차를 사가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다음 목표물인 스포츠실용차(SUV) 사진을 보여줍니다.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는 친구가 둘입니다. 그중 일한 지 3년이 되는 친구 하나는 직장 권태기가 온 모양입니다. 연구직으로 일했는데 연차만큼 실력이 쌓였는지 걱정이랍니다. 이직을 생각하고 있지만 결혼 앞두고 양가 부모님께 인사도 드린 마당에 과감하게 무언가 선택을 하는 게 부담이 되는 모양이에요. 다른 친구는 이제 상견례를 막 마쳤습니다. 날도 잡았는데 내년 11월이래요. 그런데 약혼자는 서울 북동부에서 일하고, 이 친구는 경기 남서부에서 일해요. 약혼자가 학업도 같이 하고 있기에 신혼집을 서울 한복판으로 잡았습니다. 아주 작고 오래된 아파트인데도 전세금 마련이 아주 힘들었다 해요. 일을 새로 구하는 것도 어렵고, 이제 그만두기도 어려운 사정이랍니다.
친구들과 모여서 이야기 나눠보면, 탄소배출량이니 그레타 툰베리니 귀농이니 그런 건 다른 나라 이야기입니다. 그런 친구들에게 글래스고가 어쩌고, 화석연료 저쩌고, 원자력 어쩌고 해봐야,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과 다를 게 없죠. 친구들은 제가 쓰는 칼럼에도 큰 관심이 없어요. 앞으로 책을 내기로 했다고 자랑했는데, 자랑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만나서 집, 코인, 주식, 부동산, 승진, 이직 이야기하면 헤어질 시간입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친구들이지만서도, 친구들이 좀 더 여유로웠다면 달랐을 것 같습니다. 언제쯤 그렇게 될까요. 사실 저에 비해 친구들이 더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닙니다. 자라면서 집안 사정도 다들 비슷했고, 공부도 부족함 없이 해왔는데, 어디서부터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살게 된 건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귀농에 달릴 태그가 참 많겠죠. #환경 #돈 #결혼 #교육 #먹거리 등등. 이런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건 ‘#시간'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요. 이 말은 곧 가용할 시간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어머니는 여가 시간에 벨리댄스를 추셨다 하셨죠. 저는 요새 아내와 누나와 함께 환경에 관한 스마트폰 게임을 만들고 있습니다. 강아지와 산책하며 눈에 들어온 때아닌 민들레와 철쭉을 보고, 글래스고에 있는 툰베리를 생각하기도 하고요. 이렇게 글을 쓰고, 책을 준비하는 것도 백수여서 가능한 걸지도요. 친구들과의 차이는 어쩌면 초등학교 입학하고 나서 퇴근할 때까지 눈코 뜰 새 없이 살게 되는 ‘오징어 게임'이 만들어낸 차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게임 참가자가 아닌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