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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사과의 힘

등록 2021-11-11 18:30수정 2021-11-13 13:49

[삶의 창] 홍인혜|시인

요즘 가장 흥미로운 대화 상대는 나의 조카다. 그 애는 세살인데 하루가 다르게 말이 늘고 있다. 드러누우며 ‘아이고 피곤해’라고 하는 것은 할아버지에게 배웠을 것이고, 우유를 마실 때마다 ‘건배!’ 하고 컵을 내미는 것은 제 아빠에게, 전화를 끊을 때 ‘사랑해요’라고 하는 것은 엄마에게 배웠을 것이다. 때로는 ‘가마우지가 외로워요’같이 누구도 가르치지 않은 말을 해서 모두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조카는 주로 할머니, 즉 우리 엄마와 생활하는데 종종 걷기 싫다고 응석을 부린다. 별수 없이 그 애를 안고 다니느라 엄마는 허리가 안 좋아졌다. 얼마 전에 내가 엄마의 허리를 안마해주고 있는데 조카가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할머니 아파?” 우리는 웃으며 “무거운 걸 많이 들어서 할머니 허리가 아파”라고 말했다. 그러자 조카가 시무룩한 얼굴로 이러는 게 아닌가. “아가가 안 걷고 떼써서 할머니가 아파.” 나는 꽤나 놀랐다. 늘 요구할 줄만 알던 그 애가, 원하는 것이 좌절되는 상황을 도무지 납득하지 못했던 그 애가 타인을 헤아리는 마음을 익힌 것이다. 조카는 분명 ‘미안해하고’ 있었다.

아이가 안아달라고 징징거리는 정도는 애교 수준이고, 사실 우리 어른들은 더한 잘못을 많이 저지르며 산다. 하루에도 몇명씩 물의를 일으켜 거리에 이름이 내걸린다. 갈등도 빈번하다. 경도와 탄성이 다른 마음들이 엉키고 부딪치며 사는 통에 관계에는 실금이 가기도 하고 이격이 생기기도 한다. 이 모든 사태를 해결하는 첫 단추는 언제나 ‘사과’다. 잘못을 한 누군가가 무거운 입술을 떼서 ‘미안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 이야기는 거기에서 시작된다.

때로 사건 사고를 다룬 기사에서 ‘가해자 측은 진실된 사과의 말조차 하지 않았다’라는 문장을 발견한다. 술자리에서 누군가가 본인이 겪은 고초를 털어놓고 ‘변변한 사과조차 듣지 못했다’며 분해하는 것을 본다. 나의 마음속 원망의 벽에도 인물 사진 몇장이 걸려 있다. 그 빛바랜 얼굴들 앞에 이따금 멈춰 서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됐을 텐데’ 하고 중얼거리기도 한다.

사과란 대체 무엇이길래 우리는 이토록 그에 집착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부정을 저지른 정치인에게 ‘사과하세요’라며 삿대질하고, 과오가 들통난 유명인이 플래시 세례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길 기다리는 것일까. 사과 여부를 떠나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세상 어떤 마법의 주문도 벌어진 일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그저 목울대에서 새어 나온 파동일 뿐이고, 진실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곧잘 사용되는 친필 사과문 역시 그저 펄프에 고인 잉크에 불과하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한들 실제 죽음으로 갚는 사람은 드문 것으로 보아 사과의 말에 진심이 어느 정도의 함량으로 들어 있을지조차 미지수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과를 기다린다. 그 이유는 말이 고백이자 선언이기 때문이다. 저 밑바닥에 숨어 보이지 않는 속내를 밖으로 꺼내 보여주는 선명한 행위이자, 대외적인 선포이기 때문이다. 사과란 어떤 과오를 스스로의 잘못이라 시인하는 행위이다. 실제 거기에 얼마만큼의 죄책감과 송구함이 함유되어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최소한 ‘지금 나는 나의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 처지입니다’라는 사인이라도 된다. 피해자의 존엄은 거기에서 회복되기 시작한다. ‘미안합니다’ 이 중대한 신호탄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고는 절대 감지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조카에게 ‘미안해요’라는 말을 가르칠 때가 온 것 같다. 지금 네가 느끼는 마음, 나로 인해 누군가가 힘들어하는 것을 깨닫고, 그로 인해 불편하고 민망한 지금의 심정이 바로 ‘미안함’이라고. 그걸 느끼면 그 마음을 바로 말로 표현하라고 말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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