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해ㅣ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노인이 있었다(철부지가 아니라). 소설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인 이 노인은 딱딱하게 굳은 채 반복되는 일상을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절망은 철학적인데, 왜 책상을 ‘책상’이라 부르고 사진을 ‘사진’이라 불러야 하냐는 것이었다. “달라져야 해. 달라져야 한다고!” 그는 책상을 ‘양탄자’, 침대를 ‘사진’, 의자를 ‘시계’라 부르는 식으로 모든 사물에 딴 이름을 붙인다. 세상을 새로 만들어내는 일에 환호했지만, 결국 소통은 실패하고 침묵에 빠져든다.
‘댕댕이’. 멍멍이를 ‘댕댕이’라 부르는 이들이 있다. 멍멍이가 어찌 ‘멍멍이’가 아닐 수 있단 말인가. 기세도 좋다. 최근엔 강아지를 몰고 나와 ‘댕댕이 페스티벌’이란 이름으로 반려견 잔치를 벌였다. ‘댕댕런’(반려견 마라톤), ‘댕댕트레킹’(반려견 트레킹) 따위의 행사를 진행했다. 자원봉사자는 ‘댕봉이’(댕댕이 자원봉사자). 이들은 ‘커엽다’(귀엽다), ‘띵곡’(명곡)을 만들고 글자를 뒤집어 ‘옾눞’(폭풍), ‘롬곡’(눈물)이란 말을 만들며 킥킥거린다.
노인 옆엔 아무도 없었고 ‘댕댕이’ 일파는 여럿이었지만, 공통점도 있다. 사물과 말의 결합이 필연이 아니라, 반복을 통해 변용되는 습관이라는 걸 보여준 점. 우리의 상징질서는 유일하거나 고정되거나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세계는 ‘A는 A다’라는 동어반복에서 ‘A는 B일 수도, C일 수도 있다’는 식으로 무한 확장해 나간다. 소통 단절과 소외를 걱정하지만, 소외 없는 언어는 불가능하다. 믿기지 않는다면 옆 사람에게 ‘마수걸이’가 뭔지 물어보라. 말과 민주주의는 단수가 아닌 복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