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창] 이명석 | 문화비평가
“이거 재미있겠다. 같이 배우러 갈래?” 친구가 흥분해서 묻자 나는 반사적으로 거절한다. “아니.” 궁금하긴 하다. “그런데 뭐?” 친구를 들썩이게 한 건 구청에서 여는 가전 수리 교실이다. 사실 나도 공지를 본 적이 있는데 일부러 친구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혹시 또 배우러 간다고 할까 봐. “하루 정도는 재미로 해볼 수 있지. 그런데 이건 몇주나 이어서 하잖아. 그렇게 배워서 뭐 하게?” 아차, 잘못 물어봤다. “좋은 질문이야. 전기기사 자격증도 딸 수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내 친구는 뭐든지 배우는 걸 좋아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배움의 열정을 불태우는 일이야, 원칙적으로는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 정도가 과하다 싶을 때가 적지 않다.
나를 꾀는 데는 실패했지만 친구는 주변에서 고장난 가전제품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구하기가 어려웠다. 요즘은 소형 가전은 고쳐 쓰기보다는 버리고 새 제품을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까? 그래도 당근마켓까지 수소문하더니 고장난 스탠드 조명을 낑낑대며 둘러메고 왔다. 나도 혹시나 하며 외장하드 어댑터를 건넸다. 접선 불량 정도야 쉽게 고치겠지. 수업이 끝나고 연락이 왔길래 물었다. “그래 잘 고쳤어?” “스탠드가 터졌어.” “뭐, 전구가 터졌어?” “아니, 컨트롤러. 말을 끝까지 들으라고.”
문제는 이제부터다. 친구는 돌아오자마자 폭풍 검색에 나섰다. “스위치랑 부속은 마트에서 사면 되는데 멀티미터는 어떻게 하지?” 뭔지 모르지만 전기기사용 장비를 찾는 듯했다. 나는 아예 모른 척할지, 적당히 관심을 보이며 가능한 한 가벼운 걸로 마무리시킬지 고심해야 했다. 항상 배꼽이 부풀어오른다. 내가 친구의 배움을 두려워하는 주된 이유다.
수영 수업을 위해 오리발을 사고, 명상을 배우고 싱잉볼을 사는 거야 그렇다 쳐. 내가 보기엔 초심자의 분수에 맞지 않는 물건에 욕심을 내는 일이 적지 않았다. 마을 라디오 디제이(DJ) 과정을 듣더니 믹싱기를 산다고 들썩였고, 유튜브 수업을 듣고선 짐벌 일체형 핸드헬드 카메라를 샀다. “야 너 재봉틀은 왜 샀더라?” “옷 만드는 거 배운다고 샀지.” “그것 봐. 배운다고 사서 안 쓰는 거 많잖아.” “왜 안 써. 쓸 거야. 맞다. 그때 퀼트 한다고 동대문 돌아다니면서 천 엄청 사서 쟁여놨는데.”
솔직히 이런 생각도 든다. 배우기 위해 뭘 사는 게 아니라, 뭘 사기 위해 배우는 게 아닐까? “카포에이라 배운다고 뭐 산 거 없어?” “안 샀어. 신발이야 늘 사는 거고. 포르투갈어 배우려곤 했지.” 그래, 이게 또 문제다. 뭔가를 배우면 거기에 엮인 다른 걸 배우고 그걸 위해 또 뭘 산다. “너 스페인어도 몇번 배웠잖아. 교재도 여러 권 샀고.” “집에 안 그래도 책은 많아. 그래서 정리정돈 과정도 배웠잖아.”
친구는 놀라운 삶의 순환 과정과 기적의 논리를 갖추고 있었고, 어설프게 트집을 잡아보려던 내게 역공을 가했다. “너는 내가 배우자고 해서 덕 본 것도 많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게으름뱅이에 실용주의자여서 재고 또 잰다. 웬만하면 배우기보다 독학하려고 하고, 최소 2년 이상 할 게 아니면 시작을 안 하고, 배우고 나면 그걸로 글을 쓰든 어쩌든 보상을 받기를 바란다. 그런 내가 이 친구 덕분에 물에도 뜨고 춤도 추게 되었다.
“뭐든 써먹을 수 있어야만 배우는 인간!” 친구는 나를 조롱한다. 그래, 나 같은 인간은 편협할 수밖에 없다. 삶의 어떤 순간을 충만하게 한다면 그 배움의 쓰임새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래도 나는 항변한다. “나는 진심이 움직이지 않으면 배우지 않을 뿐이야.” 친구는 당당하다. “난 항상 진심인데?” 훌륭하다. 다만 망한 취미의 유적들로 집 안을 채우지만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