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록 2021-12-07 17:03수정 2021-12-08 02:31

최재봉의 탐문 _06 생활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작가는 가난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래도 가혹하다. 자칫 문학 지망생들의 의욕을 꺾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작가들이 일반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뉴 그럽 스트리트>나 ‘명동 백작’ 이봉구의 에세이에 등장하는 문인들이 대체로 가난에 허덕이는 것은 객관적인 사태의 반영이라고 보아야 한다.

“얘야, 네가 뭔지 모를 그런 작업을 돈 받아 가면서 한다니, 너는 억세게 운이 좋구나. 남들은 일해야만 먹고사는데 말이다!”

문학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어머니가, 오랜만에 귀향한 작가 아들에게 감탄을 섞어 말한다. 미국 작가 토머스 울프의 자전적 에세이 <무명작가의 첫 책>에 나오는 일화다. 이 어머니의 생각에 작가들이 하는 일, 그러니까 글쓰기는 ‘일’의 축에 들지 못한다. 그런 어머니에게 울프는 글쓰기 역시 노동이라고 입이 닳도록 말씀드리고, “작가는 단연코 노동자”라고 거듭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생각을 바꾸었을 것 같지는 않다.

“작가가 좋아. 방에 틀어박혀 착실하게 일할 수 있고, 남들 앞에 나가지 않으니 주위에서 신비한 일을 한다고 착각해줄지도 몰라. 힘도 들지 않아. 땡볕에 땀 흘릴 일도 없어. 찬바람을 맞을 일도 없어, 만원 전철에 타지 않아도 되지. (…) 베스트셀러를 쓰면 큰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꿈도 꿀 수 있고, 선생님이라 불리면 기분 좋을 것 같아. 그렇지?”

일본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소설집 <작가 소설>에 실린 단편 ‘기코쓰 선생’에서 소설가인 기코쓰 선생이 자신을 찾아온 문학 지망 고교생에게 하는 말이다. 선생의 말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 학생이 문학에 대해 품고 있을 환상을 깨뜨리고자 반어적으로 들려주는 설명이지만, 실제로 작가의 삶에 관해 이런 식의 환상을 품은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울프 어머니의 생각과 기코쓰 선생의 설명에서 공통된 것은 무엇일까. 몸과 힘을 쓰는 육체노동이든 직장에서 눈치를 보고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하는 사무 노동이든 일반적으로 노동으로 간주되는 것과 작가가 하는 일은 다르다는 것, 작가가 하는 일이란 한마디로 ‘일 같지 않은 일’이라는 인식이 그것일 테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작가의 일이란 누구의 지시나 압박도 받지 않고,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글을 받아 적기만 하면 되는 ‘신선놀음’인가.

그런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작가가 하는 일이란 다른 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성격을 지니는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이 수월하고 우아하며 노동강도가 약한 것은 결코 아니다. 작가의 일, 그러니까 글쓰기가 여느 노동과 다르지 않은 고강도의 노동이라는 사실은 울프를 비롯해 숱한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확인하는 바다. 미국 작가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소설>에 등장하는 소설가 루카스 요더의 토로를 들어 보자.

“어떤 때는 글쓰는 일이 마치 무슨 지고한 영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 웃기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했다. 정말 글쓰기란 고된 노동인 것이다.”

영감의 도움을 받아 글이 술술 풀리는 순간이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잡히지 않는 영감을 잡고자 갖은 몸부림을 다하는 것이 글쓰기의 일반적인 형태임은 이 칼럼의 지난 회 ‘마감’ 편에서 확인했을 테다. 게다가 글쓰기가 예술작품의 창작을 위한 고투일 뿐만 아니라 밥벌이로서의 성격 역시 아울러 지닌다는 사실은 사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이 글 앞머리에서 언급한 <무명작가의 첫 책>에서 다시 한 대목을 인용해 보자.

“내가 끊임없이 써왔다면 그것은 먹고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부양해야 했다. 그런가 하면, 나는 또한 진실로 말할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 어떤 단어, 어떤 문장, 어떤 문단도 오로지 돈만을 목적으로 쓴 적은 없었다고.”

울프는 글쓰기와 문학에 관한 자신의 염결성을 방증하고자 자신이 할리우드에서 온 제안을 거부한 일화를 소개하기도 한다. 동시대 유명 작가였던 스콧 피츠제럴드가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로 상업적 성공을 누렸던 사실과 대비되는 모습이라 하겠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시인 김수영은 울프와는 사뭇 다른 고백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마리서사’라는 산문의 한 대목을 읽어 보자.

“지난 1년 동안에만 하더라도 나의 산문 행위는 모두가 원고료를 벌기 위한 매문·매명 행위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다. 진정한 ‘나’의 생활로부터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나의 머리는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받을 원고료의 금액에서 헤어날 사이가 없다.”

울프가 순결한 작가인 반면 김수영은 돈이나 밝히는 속물적인 글쟁이인 것일까. 설마 그렇게 단순하게 사태를 이해하는 독자는 없을 것으로 믿는다. 우리네 삶의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창작으로서의 글쓰기와 생계유지를 위한 글쓰기의 경계는 사실 그렇게 분명한 것이 아니다. 국경을 이루는 강물처럼 양자는 뚜렷한 경계선 없이 유연하게 넘나든다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앞서 인용한 김수영의 산문 ‘마리서사’만 하더라도 그 글은 쓰인 지 반세기가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예술과 삶의 관계에 관해 통찰과 가르침을 주는 바가 적지 않다. 독자로서 우리는 오히려 김수영으로 하여금 이런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도록 한 ‘매문·매명’의 상황에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문학과 문인들이 일반적으로 가난과 친숙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직업으로서의 문학’이 상대적으로 유망하다는 주장이 없지는 않다. <작가의 수지>라는 책을 쓴 일본 작가 모리 히로시가 대표적이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데뷔 19년차인 2015년 현재 90권가량의 소설을 포함해 278권의 책을 냈고 총 판매부수 1400만부에 15억엔의 수익을 올렸노라고 밝힌다. 이런 수치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가 소설가라는 직업을 “의외로 장래성이 있는 분야”라고 소개하는 대목이다. “인건비가 들지 않아 불황에 강하다는 점, 자본과 설비가 필요 없다는 점, 그리고 비교적 단시간에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등의 유리한 조건”을 드는 데에서 짐작하듯, 그는 철저하게 사업의 측면에서 글쓰기와 문학에 접근한다. 문학을 ‘사업’으로 대하는 태도는 영국 작가 조지 기싱의 소설 <뉴 그럽 스트리트>의 주인공 재스퍼 밀베인을 떠오르게도 한다. 이런 태도가 잘못됐다고 지적할 수는 없겠지만, 이들이 생각하는 문학이 문학의 전형과는 거리가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작가들이 오로지 사업과 생계만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업과 생계의 측면을 등한시하거나 그에 무지하고 무능하다 보니 작가들은 대체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더 나아가, 가난을 문학의 필연적인 동반자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동양의 문학 이론에 나오는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시는 가난해진 뒤에 더 좋아진다는 뜻으로, 중국 송대의 시인 구양수가 처음 이런 주장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없지 않아, 점필재 김종직 같은 이는 “넉넉한 도량과 높은 천성”을 지닌 “공후와 귀인들 중에 문장을 잘하는 사람이 어찌 적겠는가?”라며 맞서기도 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작가는 가난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래도 가혹하다. 자칫 문학 지망생들의 의욕을 꺾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작가들이 일반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뉴 그럽 스트리트>나 ‘명동 백작’ 이봉구의 에세이에 등장하는 문인들이 대체로 가난에 허덕이는 것은 객관적인 사태의 반영이라고 보아야 한다. 발자크나 도스토옙스키 같은 작가들이 사업 실패와 도박으로 인한 빚을 갚느라 초인적인 생산력을 발휘해 가며 글을 썼다는 일화는 작품 창작에 가난이 기여하는 몫이 분명히 있다는 방증으로도 보인다.

작가들의 수입원은 사실 뻔하다면 뻔하다. 시나 소설 또는 ‘잡문’이라 불리는 산문을 발표해서 받는 원고료, 그 글들을 책으로 묶어 낼 때 받는 인세, 간헐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문학상 상금과 창작 지원금, 도서관이나 학교 등에서 주관하는 초청 강연의 사례비, 신춘문예나 문학상의 심사를 해서 받는 심사료 등이 대종을 이룬다. 이 가운데 강연은 독자들과 만나 자신의 작품을 알리는 기회가 되는데다 일정한 보수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작가들의 생계에 적잖은 도움을 준다. 그런데 지난해와 올해는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작가들의 강연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그렇잖아도 궁색한 작가들의 처지가 더욱 오그라들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로 묶인 일상이 정상으로 돌아가기를 누구보다 고대하는 이들이 아마도 작가들이 아닐까.

최재봉ㅣ책지성팀 선임기자. 1988년에 한겨레에 들어와 1992년부터 30년째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에 충실하며, 문학의 본질과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거울 나라의 작가들> <그 작가, 그 공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악평> <제목은 뭐로 하지?> 등이 있다. 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