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의 탐문] _21 제목
제목은 사람으로 치면 이름에 해당한다. 표지가 책의 얼굴이라면 제목은 책의 됨됨이와 성격을 알려준다. ‘제목 장사’라거나 ‘책의 운명은 제목을 따라간다’는 등의 속설에 따르면 제목은 책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 그러니 제목이란 얼마나 무섭고도 소중한 것인가.
10여년 전에 <제목은 뭐로 하지?>라는 책을 번역한 적이 있다. 미국 출판인 앙드레 버나드가 쓴 책으로, 구미 문학작품들 제목의 유래와 사연을 흥미롭게 담았다. 원서가 짧은 분량이었던데다, 같은 취지로 국내 문학작품들 제목에 얽힌 이야기를 곁들이면 좋겠다는 편집자의 제안에 따라 내 나름으로 조사와 취재를 거쳐 40여편의 제목에 관한 꼭지를 덧붙였다.
‘서울의 달빛 0장’(김승옥), ‘은어낚시통신’(윤대녕), ‘멘드롱 따또’(조해일) 등 여러 제목 이야기 중에서 독자들의 반응이 가장 뜨거웠던 것은 김훈 소설 <칼의 노래>에 얽힌 사연이었다. 작가가 원래 생각한 제목은 ‘광화문 그 사내’였는데 출판사에서 너무 장난스럽다며 난색을 보이자 ‘칼과 길’을 대안으로 제시했고, 이번에는 너무 무겁다는 의견이 있어서 편집자가 내놓은 절충안 ‘칼의 노래’로 낙착을 보았다는 것. 이순신을 주인공 삼은 <칼의 노래>와 우륵의 이야기인 <현의 노래>에 이어 안중근을 다룰 다음 소설 제목으로 ‘총의 노래’를 두고 고민 중이라는 내용까지 그 꼭지에서 소개한 바 있다.
김훈의 안중근 소설이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나왔다. 77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출간된 <하얼빈>이 그 책. 아쉽게도 ‘총의 노래’는 아니었다. 김훈은 책을 내고 마련한 기자간담회에서 이 책 제목에 관한 뒷이야기도 들려줬는데, 자신이 처음 생각한 제목은 ‘하얼빈에서 만나자’였다고. 그 제목이 어쩐지 트로트 가사 같은 느낌이어서 단출하게 ‘하얼빈’으로 줄였다고 그는 설명했다. <칼의 노래>의 원제(?)인 ‘광화문 그 사내’ 역시 주현미의 노래 ‘신사동 그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는 후문이 생각났다.
제목은 사람으로 치면 이름에 해당한다. 표지가 책의 얼굴이라면 제목은 책의 됨됨이와 성격을 알려준다. ‘제목 장사’라거나 ‘책의 운명은 제목을 따라간다’는 등의 속설에 따르면 제목은 책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 그러니 제목이란 얼마나 무섭고도 소중한 것인가.
<제목은 뭐로 하지?>에서 소개했던 내용 가운데 이문구의 연작소설집 <우리 동네>에 관한 설명은 조금 부정확해서 바로잡고자 한다. 이 책은 ‘우리 동네 ○씨’ 식의 제목을 지닌 아홉 단편으로 이루어졌는데, 김씨와 이씨, 정씨 등 흔한 성씨를 등장시켰음에도 유독 박씨만 빠져 의구심을 자아냈다. 그 까닭이 당시 박정희 독재에 대한 작가의 증오 때문이었다고 책에 썼는데, 그와 관련해 이문구 자신이 해명해 놓은 글이 있어서 차제에 소개한다. 그의 산문집 <외람된 희망>에 실린 ‘우리 동네 시대’라는 글이 그것이다.
이 글에 따르면 이문구는 잡지에 연재하던 소설이 문제가 돼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나왔는데, 당시 수사관들이 제본해 놓은 자신의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성씨 가운데 박씨 성만 찾아 방점을 찍어 놓은 것을 보게 되었다. “방점이 찍힌 그 박씨 성의 인물이 그 소설에서 가장 부정적 인물로 그려”졌고 “또 그들 나름대로 박정희 씨를 빗댄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를 할 수도 있게 된 인물이었다.” 그 일 이후 이문구는 한가지 결심을 했으니, “부정적 인물이 됐건 긍정적 인물이 됐건 아예 모든 소설의 등장인물에 박씨 성만은 붙이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천하였다. 연작소설 <우리 동네>에 박씨 성이 없는 이유인즉슨 이것이었다.”
박완서의 단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장성한 아들을 잃은 작가 자신의 아픔에서 빚어진 작품이다. 제목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가리키는데, 김현승의 시 ‘눈물’에서 따왔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우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눈물’ 전문)
‘눈물’ 역시 김현승 시인이 아들을 잃고서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시인은 외아들 이삭을 하느님에게 기꺼이 바치려 한 아브라함처럼, 절대자에 대한 믿음으로 슬픔을 넘어서고자 한다. 그렇듯 신앙을 통해 승화된 슬픔의 결정이 곧 눈물이요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이라는 인식이다.
여기서 보듯 문학작품의 제목은 선행 텍스트에서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은희경의 장편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는 같은 뜻을 지닌 팝송 ‘세이브 더 라스트 댄스 포 미’(Save the last dance for me)의 제목을 그대로 가져온 경우다. 김영하의 경장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자살 안내인’이라는 기괴한 직업을 지닌 이를 화자로 등장시켰는데, 제목은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말에서 왔다. 사강은 1995년 코카인 소지 혐의로 체포된 뒤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 이렇게 발언했다. “국가가 왜 간섭하는가? 내가 내 몸 버리겠다는데…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인화의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의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에 나오는 대사가 원전이다. 두 딸의 입에 발린 아첨에 혹해 재산과 권력을 넘겨준 리어가, 맏딸 고너릴에게 박대와 수모를 당하고서 그런 상황을 믿을 수 없어 하며 탄식처럼 내뱉는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 없느냐?”(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라는 리어왕의 질문에 어릿광대는 “리어의 그림자”라는 답을 들려준다. 지금의 리어는 부와 권력을 움켜쥔 채 딸들의 달콤한 말에 취하던 과거의 리어가 아니라 한갓 그 그림자요 껍데기일 뿐이라는, 날카롭고 냉정한 인식을 담은 답변이라 하겠다.
김영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원제는 ‘사의 찬미, 1996’이었다. 이 역시 윤심덕의 노래에서 가져온 것인데, 문학상 응모 과정에서 제목을 바꿨노라고 작가는 밝혔다. 천명관의 <고래>는 2004년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했을 때 ‘붉게 구운 슬픔’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됐다가 책으로 내면서 지금의 제목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작가 자신이 공모에 보낸 최초 원고의 제목은 이 둘과도 또 달라서 ‘붉은 벽돌의 여왕’이었다고 천명관은 인터뷰에서 말했다. 최인호는 신문 연재소설 <별들의 고향>의 제목으로 ‘별들의 무덤’을 생각했는데, 아침 신문 연재소설 제목에 ‘무덤’이 들어가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신문사 쪽 우려에 ‘고향’으로 바꾸었다. 정유정의 소설 ‘해피 버스데이’는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소설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라 ‘7년 만의 밤’을 거쳐 <7년의 밤>으로 귀결됐다. 최인훈의 후기 대작 <화두>는 ‘쇄빙선’이라는 제목으로 출발했다가 ‘공안’을 거쳐 지금의 제목으로 바뀌었다. 최인훈은 이 소설의 서시로 ‘쇄빙선’이라는 다섯 행짜리 시 역시 써 두었는데, 전문이 이러하다.
“자 마음이여/ 노여움에 입을 다문/ 기억의 얼음 바다를 깨면서/ 거기 먼 곳// 슬픔의 항구에 닿자”
박민규는 엉뚱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을 즐겨 짓는 편이다. 소설집 <카스테라>에는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아, 하세요 펠리컨’ ‘대왕오징어의 기습’ 같은 동물 시리즈(?)가 들어 있다. 그의 두권짜리 소설집 <더블>에도 흥미로운 제목을 단 작품이 여럿인데,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깊’ ‘슬’(膝), 그리고 ‘용 룡’(龍) 자가 위에 둘 아래에 둘 도합 네개나 쓰인 ‘수다스러울 절’이라는 한자를 제목으로 삼은 작품 등이 대표적이다.
<제목은 뭐로 하지?>의 지은이가 처음 생각한 자신의 책 제목은 ‘무제’였다고 한다. 고은 시인이 2013년에 낸 시집 <무제 시편>에는 책과 같은 제목 아래 일련번호만 붙인 시 539편이 실리기도 했다. ‘무제’를 내세우는 것은 제목 짓기의 어려움 때문일 수도 있겠고, 특정 제목이 오히려 작품의 풍요로운 울림을 제한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어쨌든 글이나 책에는 제목이 달려야 하는 법. 개성 있고 매력적인 제목을 찾고자 분투하는 작가와 편집자들에게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최재봉 | 책지성팀 선임기자
1988년에 한겨레에 들어와 1992년부터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에 충실하며, 문학의 본질과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거울 나라의 작가들> <그 작가, 그 공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악평> <지구를 위한 비가> 등이 있다.bong@hani.co.kr
1988년에 한겨레에 들어와 1992년부터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에 충실하며, 문학의 본질과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거울 나라의 작가들> <그 작가, 그 공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악평> <지구를 위한 비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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