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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저녁이 있는 삶, 쉼표 있는 삶, 그 다음은… / 이종규

등록 2021-12-14 14:29수정 2021-12-14 18:38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지난달 23일 오전 서울 신촌 스타광장에서 열린 ‘주 4일제’ 도입 캠페인에서 발언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지난달 23일 오전 서울 신촌 스타광장에서 열린 ‘주 4일제’ 도입 캠페인에서 발언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종규 | 논설위원

가장 기억에 남는 선거 슬로건을 고르라면, 나는 주저 없이 ‘저녁이 있는 삶’을 꼽겠다. 2012년 손학규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 후보가 내세운 슬로건이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질 좋은 일자리를 늘려 노동자들이 가족과 함께 저녁을 보낼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손 후보가 당내 경선에서 지면서 공약의 구체적인 내용은 잊혀졌지만, 슬로건만큼은 꽤 오래 살아남았다. 지금도 직장인들이 야근 문화나 장시간 노동을 성토하는 자리에 자주 소환되곤 한다. 얼마 전 내가 사는 지역에 서울을 오가는 교통편 확충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내걸렸는데, 거기에 ‘우리도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라는 문구가 적힌 걸 보고 웃었던 기억도 있다. 통근시간이 줄어야 저녁이 있는 삶도 가능할 테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들이 귓등으로 흘려듣곤 하는 정치 슬로건이 이처럼 오랜 시간 대중 속에서 생명력을 갖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시민들의 욕구가 그만큼 절실하다는 방증이리라.

2017년 대선에서도 노동시간 단축과 휴식권 보장이 주요 의제가 됐다. ‘표심’이 거기에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쉼표 있는 삶’을 내세웠다. 연차휴가 사용 의무화, 대체휴일 확대 등을 통해 ‘쉴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했다. ‘주 52시간 근무제’도 약속했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퇴근 이후 메신저 등을 통한 업무 지시를 제한하는 ‘칼퇴근법’ 제정을,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주 35시간 근무제’ 도입을 공약했다.

‘저녁이 있는 삶’ 이후 10년이 흐른 2022년 대선을 앞두고는 ‘주 4일 근무제’가 이슈로 떠올랐다.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조정훈 시대전환 후보와 박영선 민주당 후보가 각각 ‘주 4일 근무제’와 ‘주 4.5일 근무제’를 공약으로 제시한 데 이어, 최근엔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1호 공약’으로 ‘주 4일 근무제’를 내걸었다. 우선 2023년부터 교대제 및 야간노동 사업장 등을 대상으로 시범 운영을 한 뒤, 2025년부터는 다른 사업장에도 단계적으로 확대하자는 것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도 “당장 공약으로 삼기엔 이르다”면서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논의 주제로 이야기할 때가 됐다”고 밝혔다.

이처럼 선거 때마다 노동시간 단축 공약이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과로 사회’, ‘시간 빈곤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제 통계가 잘 보여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를 보면, 지난해 한국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1908시간으로 지난해 수치가 집계된 회원국 중 세번째로 길었다. 한국의 노동시간은 오이시디 평균(1687시간)보다 221시간, 노동시간이 가장 짧은 독일(1332시간)과 견주면 576시간이나 길다. 그나마 2018년 7월부터 순차적으로 ‘주 52시간 근무제’를 도입해서 이 정도다. 그 이전에는 늘 멕시코와 1·2위를 다퉜다.

심상정 후보가 공약 발표 때 언급했듯이, ‘주 4일 근무제’가 먼 미래의 꿈 같은 이야기만은 아니다. 아이슬란드와 스페인에선 이미 정부 차원에서 시범 운영을 시작했고, 일본에서도 집권 자민당이 도입을 논의 중이다. 아랍에미리트(UAE)는 내년부터 세계 최초로 공공부문에 ‘주 4.5일 근무제’를 도입한다고 발표했다. 유럽과 미국에는 자발적으로 주 4일 근무를 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 국내에서도 ‘주 4일’ ‘주 4.5일’ ‘격주 놀금(노는 금요일)’ 등 여러 형태로 노동시간을 줄이려는 시도가 확산되고 있다.

‘주 4일 근무제’와 같은 노동시간 단축이 우리 삶에 가져올 변화는 지대하다. 보통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만 떠올리기 쉬운데, 그게 전부는 아니다. 육아와 가사의 공평한 분담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자원봉사나 사회 참여와 같은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여유도 생긴다. 주 4일만 출근하게 되면 온실가스 배출 감축에도 도움이 된다. 출퇴근 교통량과 사무실 에너지 소비가 줄기 때문이다.

물론 ‘주 4일 근무제’가 하나의 제도로 자리잡으려면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 가능할지가 가장 큰 난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 단시간 저임금 노동자와 불안정 노동자 등 취약계층의 ‘적정 소득’ 보장 등의 문제도 함께 풀어야 한다. 사회보장제도의 확충이나 경제민주화와 같은 보완책이 뒤따르지 않으면, 소외계층의 상대적 박탈감과 노동 양극화만 심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는 새겨들을 만하다.

그러나 ‘주 5일 근무제’도 숱한 우려를 불식하고 우리 사회에 안착했다.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친 뒤 단계적으로 도입한다면 ‘주 4일 근무제’라고 해서 실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지금은 4차 산업혁명과 기후위기, 팬데믹 등이 촉발한 ‘대전환’의 시대다.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력이 절실한 때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이미 90년 전에 한 주에 15시간만 일해도 되는 미래를 상상했다. 이번 대선이 ‘주 4일 근무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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