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분씨는 서울 지하철 왕십리역 11번 출구 앞에서 노점을 한다. 그의 둘째 딸이 1991년 5월25일 시위 도중 숨진 김귀정 열사다. 다큐멘터리 <왕십리 김종분> 스틸컷.
[삶의 창] 김소민ㅣ자유기고가
김종분(82)씨는 지하철 왕십리역 11번 출구 앞에서 노점을 한다. 이 자리에서만 30년 넘었다. 그는 요즘 “막가파 인생”을 살며 “최고로 호강하고 있다”고 말한다. 맨해튼에 캐리와 친구들이 있고 왕십리엔 종분씨와 친구들이 있다. 다큐멘터리 <왕십리 김종분>(감독 김진열)에서 네 할머니는 종분씨 노점에 모여 앉아 수시로 연탄불에 가래떡을 구워 먹는다. 별말도 안 한다. 다들 그 자리에서 십수년 장사했다. 이름 대신 ‘야채’ ‘꽃장사’ ‘우리슈퍼’라 부른다. 매일, 오래 본 사이다. 종분씨가 일 있어 ‘야채’가 가게를 봐준 날, 한 남자가 예전에 종분씨에게 꿨다며 2만원을 건넸다. 종분씨가 돌아오자 ‘야채’는 결산보고를 한다. “10만2000원 들어온 중에 6만원 내가 썼어.” 넷은 음식점에서 뽑아온 100원짜리 믹스커피를 함께 마신다.
“꽃장사가 화투 치재. 10원짜리.” 이 할머니들은 같이 살진 않는데 퇴근해도 모여 있다. 그날 30년 전 종분씨에게 3만원을 꿔 간 남자가 어제 본 사람처럼 나타나 6만원을 갚고 호박, 모과를 두고 갔다. 종분씨는 그 6만원 중에 만원을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한테 덜컥 또 꿔줬다. “그 돈은 왜 주냐”고 한 친구가 좀 나무랐다. 넷은 같이 호박죽을 끓여 먹었다.
4인방의 삶은 고만고만하게 지난했다. 종분씨는 낮에는 가정부로 일하거나 건설현장에서 모래짐을 날랐고 해가 지면 노점을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연탄 두장을 사 들고 집에 가 그날 밤 추위를 면했다. 그 세월을 지나 종분씨는 이제 이렇게 말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이 딱 좋아.”
종분씨는 홀로 통곡할 때가 있다. 30년이 흘렀지만 그는 딸의 비석을 쓰다듬으며 여전히 운다. 그의 둘째 딸이 1991년 5월25일 과잉진압으로 숨진 김귀정 열사다. 그런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견뎌진다. 10원짜리 화투를 치며, 가래떡을 구워 먹으며, 믹스커피를 홀짝이며, 딸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함께.
1991년 5월 고 강경대 열사 살인 만행 규탄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의 살인 진압에 숨진 고 김귀정 열사.
한동안 언제나 행복한 푸 시리즈가 인기를 끌었다. 아예 저자 이름이 곰돌이 푸인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나를 사랑한다면 어쨌든 즐겁게 살 수 있어요.” 그런데 푸는 혼자서도 자기를 사랑할 수 있을까?
푸는 쫓겨날 일이 없는 자기 공간이 있다. 독거인데 문만 열고 나가면 친구들이 있다. 넘쳐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는 피글렛이 따라다닌다. 아무도 푸에게 바지를 안 입을 거면 살이라도 빼라고 하지 않는다. 이 마을에서 우울한 당나귀 이요르만 집이 없는데, 푸와 피글렛이 이요르의 집을 짓는다. 푸는 “최고의 집”이라고 생각한다. 집들이 날, 동네 친구들이 몰려든다. 이 에피소드에는 이런 내레이션이 흐른다. “푸와 피글렛은 자기들이 한 일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어릴 때 봤던 만화영화들은 대개 그랬다. 스머프 마을에서 스머프들은 따로, 또 함께 살았다. 고만고만한 집에서 혼자 살고, 일어나자마자 친구를 만났다. 투덜이, 똘똘이, 개구쟁이… 개성은 있고 우열은 없었다. 사실 어린 시절 이 만화들에서 행복해지는 법을, 적어도 삶의 고통을 견뎌내는 법을 다 배워놓고, 모르는 척 푸에게 자꾸 물어본다.
김종분씨는 일년에 한번 가족들과 함께 몇백명의 밥을 한다. 여전히 딸의 추모식에 오는 사람들에게 먹일 밥이다. 둘째 딸 대신 딸의 친구가 그를 종종 찾아온다. “나는 할 일 다 했어. 아들도 낳아봤고 딸도 낳아봤고 집도 사봤고 날려보기도 했고 곗돈 뺏기기도 해봤고 식모살이도 해봤고… 작은(둘째) 딸이 있어서 팔도강산 다 돌아다니며 대학생들을 만나고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식구들도 알게 됐고….” 종분씨는 울면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