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모자라서 쓰는 모자

등록 2021-12-30 18:27수정 2021-12-31 02:31

[삶의 창] 이명석 | 문화비평가

퇴근 시간 무렵 도서관 앞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대여섯살 정도의 아이가 빵모자가 답답한지 자꾸 손으로 당기다 떨어뜨렸다. 엄마가 다시 단단히 씌우며 말했다. “똑바로 쓰고 있어.” 아이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모자는 왜 쓰는 거지?” 혼잣말 같은 물음이 내 머릿속에 작은 파문을 만들었다. 나는 모자를 즐겨 쓴다. 그때도 사할린 북쪽에서나 어울릴 거창한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엄마가 주변을 둘러보다 나를 쳐다봤다. 아이에게 대신 답을 해줘야 할까 고민하는데 엄마가 먼저 눈을 돌렸다. “저기 봐. 경찰 아저씨도 모자 썼잖아.” 차들로 꽉 막힌 사거리에서 교통경찰이 신호 제어기를 조작하고 있었다. “모자를 쓰고 있으니까 신호등도 마음대로 바꾸는 거야.”

얼마 전 최호철 개인전에서 본 ‘1970년대 공주 제민천 하숙촌 풍경’이라는 그림이 떠올랐다. 남녀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데 남학생들만 교모를 쓰고 있었다. 그게 좀 신기했다. 왜 남학생만 썼을까? 어떤 소속과 권위를 부여하는 거겠지? 각지고 딱딱한 챙의 모자를 쓰고 경례를 붙이는 아들을 보며 부모는 뿌듯했을 것이고.

교모는 아니고 군모는 쓴 적이 있다. 그때 고참들이 반들반들 모자의 각을 잡곤 했는데 나로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가 봐준다고?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외부 훈련을 위해 부대원 수십명이 트럭에 올라타 마산 시내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제일 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군모가 날아가버렸다.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다. 다행히 뒤따라오던 차량의 하사관이 주워 욕만 잠깐 먹었지, 군모도 없이 훈련 조교들 앞에 섰다간…. 그러니까 모자는 나같이 모자란 인간도 군인을 만들어준다. 해적은 해적 모자, 마녀는 마녀 모자, 셜록 홈스는 사슴 사냥꾼 모자를 써야 완성이 된다.

경찰모는 신호등을 바꿔주지 않았고 횡단보도 앞에 사람들이 쌓여갔다. 알록달록 모자들도 늘어났다. 엄마가 말했다. “저것 봐. 다들 추우니까 모자 쓰고 있잖아.” 아이가 받아쳤다. “엄마는 안 썼잖아.” 아까부터 그게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숱이 많잖아.” 과연 반곱슬에 숱이 빽빽해 포근하고 폭신해 보였다. “그럼 난 털이 없어서 모자 쓰는 거야? 할아버지처럼.”

알아챘구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만 모자는 결국 털이 모자라서 쓰는 거다. 인간은 진화의 어떤 과정에서 미끄러져 몸의 털을 잃었고 사시사철 옷을 입고 신발을 신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인간들은 머리털까지 빠르게 잃어간다. 나는 이런 자학적 가설을 가지고 있다. 조선의 갓이나 서양의 중절모도 격식은 핑계일 뿐, 늙은 남성들의 탈모를 가리려는 술책이 아니었을까?

물론 모자의 발전에는 실용적 예술적 동기도 큰 역할을 했다. 바스크의 목동들은 비와 바람을 막으려고 베레모를 썼고, 에콰도르 사람들은 뜨거운 햇빛을 피하려고 파나마모자를 만들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직업의 상징으로 빵떡모자를 썼고, 영국의 귀족들은 화려한 모자에 심취해 로열 애스콧 같은 행사도 만들었다. 하지만 머리 감기 귀찮고 낯빛이 꾀죄죄한 날에 푹 눌러쓰고 나가는 게 또 모자다.

모자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척 은근슬쩍 감추는 역할을 한다. 진짜 목적은 빈약한 숱, 비뚤어진 두상, 항암과 수술의 자국을 감추려는 것이더라도, 단지 멋내기 위해 썼다고 주장할 수 있으니.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멋진 모자를 쓸수록 그 숲속에 우리의 약점들을 숨길 수 있다.

띠링! 드디어 파란불이 켜지고 횡단보도 양쪽에서 모자들이 모여든다. 고양이와 여우 귀를 단 모자들이 지나가자 아이도 자신의 모자를 토닥여본다. 모자는 모자라서 쓴다. 털이 모자라서, 열이 모자라서, 귀여움이 모자라서.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햄버거집 계엄 모의, 조악한 포고령…국가 위협한 ‘평균 이하’ 1.

햄버거집 계엄 모의, 조악한 포고령…국가 위협한 ‘평균 이하’

한강은 보았다…계엄군의 머뭇거림을 [특파원 칼럼] 2.

한강은 보았다…계엄군의 머뭇거림을 [특파원 칼럼]

‘어준석열 유니버스’ 너머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3.

‘어준석열 유니버스’ 너머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윤석열, 극우 거리의 정치 올라탈까…트럼프식 부활 꿈꾸나 4.

윤석열, 극우 거리의 정치 올라탈까…트럼프식 부활 꿈꾸나

한덕수 권한대행, 내란·김건희 특검법 즉각 공포하라 [사설] 5.

한덕수 권한대행, 내란·김건희 특검법 즉각 공포하라 [사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