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창] 홍인혜 | 시인
지난 연말의 일이다. 빼곡한 낮을 보내고 듬성한 밤을 즐기며 거실에서 홀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 음악을 더 큰 소리로, 고막이 꽝꽝 울리도록 듣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물론 이런 시시한 욕망 때문에 볼륨을 높여 이웃들의 입에서 욕설이 나오게 할 순 없기에 재빨리 겉옷을 주워 입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곳이 어디냐면 집 근처의 작은 술집이다. 벽면 가득 엘피(LP)와 시디(CD)가 빼곡한 소위 뮤직바인데 사장님이 음악에, 특히 오디오에 진심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두툼한 철문을 밀고 들어서면 거대한 스피커에서 클래식이나 올드팝, 영화음악이나 옛 가요가 온몸에 와락 밀려드는 이 바를 처음 가보고 깨달았다. 이어폰으로 들었을 때 이어폰만하던 감동도 집채만한 스피커로 들으니 집채만해지는구나. 숱하게 들어 일상의 배경음 정도가 되어버린 음악도 이곳에서 들으면 새로이 전율이 일곤 했다. 정교하게 배치된 음향시설이 사방에서 청자를 겨냥하고 사운드를 때려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가게를 무척 좋아하지만 자주 가진 못했다. 술자리는 동행인이 있기 마련인데 이 바는 대화하기엔 적당하지 않아서였다. 그곳은 모두가 입에는 향기로운 술을 머금고 귀는 압도적인 음악에 담근 채 말을 멈추는 곳이다. 현실적으로 음악이 너무 크기 때문에 대화가 불가능하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미 삼라만상에 대해 떠들어 하루 정도는 입을 다물어도 좋은 가까운 사람과 가거나, 혼자 가는 수밖에 없는 가게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 딱이지, 중얼거리며 추운 밤거리를 걷다 퍼뜩 떠올렸다. 요즘 술집들이 저녁 9시까지만 영업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미 8시40분을 넘긴 시간이었다. 바에 도착하면 영업 종료 시간까지 십여분이 빠듯이 남을 듯했다. 노래 두어곡 정도야 들을 수 있는 시간이긴 해도, 이렇게 마감 직전에 들이닥친 손님을 받아나 줄까? 나는 갸웃하며 나무 계단을 올라가 철문을 밀고 가게에 들어섰다.
익숙한 노란빛 조명 아래 손님 서너명이 서로가 아닌 스피커를 향해 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거대한 스피커에서 거대한 음악이 쏟아지고 있었고 사장님은 음악을 트시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나는 가게 한구석으로 조용히 스며들어가 의자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얹었다. 나의 기척을 느낀 사장님이 다가오시더니 나에게 손짓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손짓이었다. 아, 역시 마감 직전이라 손님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로구나. 하는 수 없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커다란 음표와 음표 사이를 비집고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자리보다 이쪽이 사운드가 좋아요.” 사장님은 나를 내보내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더 음악을 듣기 좋은 자리로 안내하고 싶은 거였다. 자신이 공들여 조성해둔 그 음악의 낙원을 손님이 명당에서 즐기길 원한 거였다. 그 객이 고작 10분 남짓한 시간 머물다 갈 사람임에도 말이다. 나는 사장님이 새로이 권한 자리로 옮겨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흑맥주를 마시며 음악에 빠져들었다. 사장님은 아까 자리보다 이 자리 사운드가 좋은 걸 어찌 아셨을까. 귀를 쫑긋 세우고 이리저리 가게를 돌아다니며 앉아보셨을까. 음, 여기보단 저기가 우리 가게의 로열석이군, 생각하셨을까. 사장님은 어디까지 오디오에 진심인 걸까.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것을 누군가 최상급으로 즐기길 바라는 마음은 무엇일까. 나는 누군가에게 내 취향을 이토록 전력으로 소개한 적이 있었나.
이어진 곡은 누군가 신청한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이었다. 스피커가 묵직하게 울리기 시작했고 가게를 채운 모든 사람의 마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 노래를 태어나 처음 듣는 사람처럼 깊이 감격했다. 2021년 최고의 10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