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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빨래방 구직기

등록 2022-01-20 17:54수정 2022-01-22 18:09

빨래방 일은 나한테 제격이었다. 하지만 면접 결과, 떨어졌다. 게티이미지뱅크
빨래방 일은 나한테 제격이었다. 하지만 면접 결과, 떨어졌다. 게티이미지뱅크

[삶의 창] 김소민 | 자유기고가

월 30만원. 올해 건강보험료를 보고 충격받았다. 내 들쑥날쑥한 쥐꼬리 소득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프리랜서로 건강보험 지역가입자다. 서울 원룸 전셋값도 안 되는 집이 경기도 북쪽 구석에 있는데 그게 문제였다. 집을 팔까? 그럼 월세는? 2019년 아르바이트했던 업체들에서 ‘해촉증명서’를 일일이 떼 오면 보험료 조정을 받을 수 있단다. 여기저기 읍소해 받았다. 건보료 월 1만원 줄여줬다. 60억대 부자인 김건희씨는 자산은 따지지 않는 직장보험 가입자라 월 7만원 건보료를 냈다는 기사를 읽었다. 대단하다. 4대 보험 가입이 가능한 일자리를 폭풍 검색했다.

찾았다. 우체국 빨래방에서 하루 4시간씩 일하면 시급 9100원을 준단다. 공고에 나온 서식에 맞게 이력서를 쓰려는데 난감했다. ‘관련 경력’만 적으란다. 이력서에 이름과 주민번호, 주소밖에 없다. 자기소개서도 쓰란다. 성격의 장단점을 묻는다. 이런 질문 받을 때마다 대체 누가 진짜 단점을 쓸지, 거짓말할지 알면서 왜 묻는지 궁금하다. 장점은 근면 성실, 단점은 제일 감점이 덜 될 거 같아 ‘소심하다’고 적었다.

서류전형에서 탈락할 줄 알았는데 붙었다. 오랜만에 면접을 보려니 떨렸다. 30대 후반부터 50대까지 여성 5명이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우체국 직원은 유니폼이나 숙직실 이불 따위를 빠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경쟁자들은 모두 고수로 보였다.

면접관 두명은 친절했다. 자기소개를 해보라는데 할 말이 없어 당황했다. “가끔 글을 써요.” 말하지 말걸 그랬다. “영감 떠오르면 글 쓰신다고 그만두시는 거 아니에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요.” 면접관들이 웃었다. “단추 달기나 바느질도 하실 수 있겠어요?” 순간 머뭇거렸지만 거짓말했다. 벼락치기로 배울 작정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성격의 단점은?” “많은데요.” “하나만 꼽아보세요.” “소심해서 자꾸 곱씹어요.” “직원들과 갈등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소심하고 곱씹는 사람들은 뒷담화를 할지언정 앞에서 큰 갈등은 안 일으켜요.” 면접관들이 또 웃었다. 이것은 그린라이트인가?

급습이 들어왔다. “뭐가 가장 힘드셨어요?” 사실대로 말했다간 떨어질 거 같다. 시간이 흘렀다. 면접관들은 답을 기다렸다. 손톱 거스러미를 잡아 뜯었다. 기자 일 할 때 기억이 떠올랐다. 한 철거현장 취재 경험을 얘기했다. 괴로웠던 건 사실이지만 동문서답이다. 면접이 끝나고 친구한테 전화했더니 “미쳤냐”고 난리다. “너라면 기자로 일했던 사람을 빨래방에 채용하고 싶겠냐? 제보하라고?” 왜 하필 기자 시절 기억이 떠올랐을까?

나는 내 위선을 보았다. 여기저기 빨래, 청소, 밥 짓기 등 삶에 필수적인 노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글을 썼다. 왜 사람을 살리는 노동은 홀대받아야 하는지 분기탱천하며 썼다. 진심이었다. 그런데 그 면접실에서 나는 아마 이런 말이 하고 싶었던 거 같다. ‘나 빨래하는 사람 아니에요.’ 무시당할까 봐 두려웠다. 내 무의식은 그렇게 밥상을 엎었다. 돌봄 노동은 숭고하지만 ‘내’가 할 수는 없다는 거다. 왜 가치 있다고 자기 입으로 침 튀기며 말한 노동을 자기는 할 수 없나?

사실 이 빨래방 일은 나한테 제격이었다. 4시간만 일하니 하루 두번 산책해야 하는 개 키우는 데도 딱이다. 고정수입이 들어온다. 몸을 움직이는 노동은 정신건강에 좋다. 빨래에 대한 편견만 없었다면 헛소리하지 않고 합격의 기쁨을 맛봤을지도 모른다. 내 편견은 내 자유를 제한했다. 이 얘기를 나보다 어린 올해 30살 되는 친구에게 했는데, 반응에 놀랐다. “세대차이 느껴져요. 제 또래는 그런 편견 별로 없는 거 같아요. 그런 일 구하기 힘든 거 알거든요. 빨래방 5 대 1이잖아요.” 현타가 왔다. 빨래방,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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