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멸렬은 ‘흩어지고 찢겨 갈피를 잡을 수 없다’라는 뜻이다. ‘지리멸렬’한 대통령 후보 TV 토론회를 보며 봉준호 감독의 단편영화 <지리멸렬>이 떠올랐다. 봉 감독이 1994년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다닐 때 만든 영화다. 영화는 세 편의 서로 다른 이야기와 이를 연결한 에필로그 등 네 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형식이다. 러닝타임은 30분으로 짧지만, 봉 감독 특유의 우리 사회를 보는 비판적인 시선이 드러나 있다.
<지리멸렬>은 우리 사회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인간 군상의 허위와 위선을 보여준다. 첫째 이야기엔 연구실에서 포르노 잡지를 보고 학생을 부려먹지만, 강의실에선 근엄하게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르치는 심리학과 교수가 나온다. 둘째 이야기엔 아침 운동을 하면서 남의 집 앞에 놓여 있는 우유를 습관적으로 훔쳐 먹은 뒤, 신문배달원을 범인으로 둔갑시키는 사람이 등장한다. 마지막 이야기엔 아파트 잔디에 용변을 보려다가 경비원에게 훈계를 듣자 모욕을 당했다며 비열하게 복수하는 사람이 나온다.
영화 에필로그를 보면, TV 토론회 장면이 나온다. 사회자가 반사회적 흉악범죄가 판친다며 우리 사회의 도덕성을 진단하는 세 명의 전문가를 소개한다. 대학 심리학과 교수, 신문사 논설위원, 부장검사다. 바로 앞 에피소드에 나온 권력자들이었다. 학계·언론계·공권력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세 사람은 접점을 찾기 어려운, 흩어지고 찢겨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다. 여기서 끝났다면 봉준호답지 않다. 봉 감독은 이들의 민낯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 에필로그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나온다. 새벽 일을 나가기 위해 일찍 잠드는 신문배달원, 교수가 티브이에 나오자 관심을 보이는 대학생, 아파트 주민들을 위해 순찰하는 경비원이다. 이들 모두는 앞서 나온 권력자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이다.
이 마지막 장면이 대선을 앞둔 우리에게 오버랩됐다. TV 토론회에 나온 후보들의 ‘내로남불’ 한 말에 ‘혹’해서 앞으로 5년 동안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야 할 우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들이 내놓은 정책을 좀 더 꼼꼼히 알아보고 그들의 인물 됨됨이를 좀 더 따져 본 뒤 투표해야 한다. 아, 투표 전에 봉 감독의 <지리멸렬>을 한번 보시는 걸 추천한다.
정혁준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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