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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피조물의 독립 선언

등록 2022-02-22 14:50수정 2022-02-23 02:01

최재봉의 탐문 _11 작중인물
창작자와 그의 피조물의 관계란, 특히 예술 작품에서는, 생각처럼 단순하지는 않았다. 멀게는 그리스 신화 속 피그말리온 이야기에서부터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나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같은 소설에 이르기까지 창조자의 손끝에서 빚어진 작품으로서의 피조물이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니는 사례가 적지 않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이라는 영화를 흥미롭게 보았다. ‘소설보다 낯선’이라는 제목에서는 짐 자무시 감독 영화 <천국보다 낯선>에 대한 오마주의 느낌도 나는데, 두 영화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주인공 해럴드 크릭은 국세청 공무원. 숫자에 민감한 직업 탓인지 기상 시각에서 칫솔질 횟수, 출근 버스 탑승 시각, 취침 시각 등 정해진 일과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산다. 그러던 그의 삶에 이상한(낯선!) 일이 벌어진다. 누군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중계하듯 서술하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리더니 어느 날은 그가 머지않아 죽을 것이라고 ‘예고’하는 게 아닌가. 그 목소리의 정체를 찾고 예고된 죽음을 막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크릭은 마침내 충격적인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자신이 누군가(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가 쓰는 소설의 주인공이며, 그 작가는 아닌 게 아니라 소설의 결말을 장식하게 될 그의 죽음의 방식을 놓고 궁리 중이라는 것.

죽이려는 소설가와 죽지 않으려는 등장인물이 맞서는 이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고 또 마무리될 것인가. 나머지 이야기는 영화에서 직접 확인하는 게 좋겠지만, 여기까지의 줄거리만으로도 어떤 유명한 소설을 떠올리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보르헤스의 단편 ‘원형의 폐허들’이 그 작품.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의 꿈속에서 한 인간(‘아들’)을 탄생시키고 훈련을 거쳐 세상에 내보내려 하는 인물인데, 길지 않은 소설의 결말 장면에서 그는 놀라운 깨달음에 이른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안도감과 함께, 치욕감과 함께, 두려움과 함께 그는 자신 또한 자신의 아들처럼 다른 사람에 의해 꿈꾸어진 하나의 환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꿈속의 꿈, 속의 꿈, 속의 꿈….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무는 이런 상상은 장자의 나비 꿈(호접몽) 이야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매트릭스>와 <인셉션> 같은 영화나 최근 각광받는 온라인 공간 메타버스의 원리가 호접몽과 다르지 않다 하겠다.

작가와 작중인물의 관계란 흔히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견주어지고는 한다. 작가는 작중인물의 생사여탈에 관한 전권을 쥔 신과 같은 존재고, 작중인물은 작가의 손끝에 자신의 운명을 하릴없이 맡겨야 하는 수동적인 처지일 따름이라는 것. 그런데 <스트레인저 댄 픽션>에서 작중인물인 크릭은 자신을 죽이려는 작가의 뜻에 맞서 제 목숨을 보전하고자 분투한다. 독립이요 항명인 셈이다.

작중인물이 작가의 의지를 벗어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례는 뜻밖에도 드물지 않다. 문학이 강자보다는 약자에게 더 공감하는 예술 장르인 까닭일까. 작가들은 강자인 작가 자신보다는 약자라 할 작중인물을 역성드는 작품을 종종 내놓고는 한다. 이탈리아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의 희곡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에서는 연극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자 연습 중인 연출가와 배우들을 ‘등장인물’ 여섯 사람이 찾아온다. 이들은 어느 극작가가 자신들을 탄생시켜 놓고서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며, 연출가와 배우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로 연극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며 그들 앞에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연극을 ‘공연’하기까지 한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아버지’가 연출가에게 하는 말은 등장인물의 독립 선언이라 할 법하다.

“등장인물은 일단 태어나면 곧장 자신의 작가로부터 벗어나 독립성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작가가 그를 놓아두려고 생각지도 못한 무수한 다른 상황들 속에서 모든 사람들에 의해 상상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작가가 그에게 부여하려고 꿈도 안 꾼 어떤 의미를 얻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는 희곡과 연출 및 연기의 관계에 관한 설명이라 하겠지만, 문학 일반으로 범위를 넓혀 보자면 독서에 관한 통찰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같은 소설과 같은 인물의 이야기라 해도 읽는 이에 따라 다채롭고 때로는 상반되기까지 한 독해가 가능한 것이 문학의 세계다. 작가가 어떤 등장인물에 관해 소설 속에 묘사해 놓은 바가 모든 독자에게 온전히 전달되고 받아들여지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노릇이다. 남원에는 춘향의 묘가 있고, 런던에는 셜록 홈스의 집무실이 있다. 춘향도 홈스도 실존 인물이 아닌 문학작품 속 등장인물인데 말이다. 춘향이야 설화와 판소리계 소설이어서 작자를 알기 어렵다지만, 셜록 홈스는 엄연히 영국 작가 아서 코넌 도일이 창조한 작중인물임에도 작가보다 더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독자들의 항의로 미수에 그치기는 했지만 도일이 홈스를 작품 속에서 죽게 만들려 했던 시도가 혹시 자신의 창조물에 대한 작가 쪽의 시기와 질투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작가의 살해 시도를 뚫고 되살아난 홈스는 작가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생명력을 과시하며, 정작 자신을 탄생시킨 작가가 죽은 뒤에도 그 자신은 죽지 않고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괴도 뤼팽’의 프랑스 작가 모리스 르블랑은 도일이 살아 있던 당시에 <뤼팽과 홈스의 대결>이라는 소설에서 홈스를 뤼팽에 비해 떨어지는 인물로 묘사해 도일과 영국 독자들의 분노를 자아낸 바 있다.

최제훈의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에 실린 단편 ‘셜록 홈스의 숨겨진 사건’은 아예 아서 코넌 도일이 밀폐된 방 안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사건을 다름 아닌 셜록 홈스가 해결한다는 설정을 담았다. 이 작품에서는 도일과 홈스가 치열한 지략 대결을 펼치는데, 사건의 배경에는 홈스에 대한 도일의 질투가 놓여 있다. “피조물이 점점 현실의 신화가 되어갈수록 창조주는 모든 가능성을 거세당한 채 신전 한구석의 석상으로 굳어간다”, “작가가 자신이 창조한 인물에 대한 열등감으로 그를 죽이고, 다시 부활한 그가 복수를 하듯 작가를 실제 죽음으로 내몬다”는 등의 대목은 작가와 등장인물 사이의 뒤바뀐 권력관계를 말해 준다.

‘한 소설가의 자서전’이라는 부제를 단 미국 작가 필립 로스의 <사실들>은 자전적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에 있는 작품이다. 로스가 일인칭으로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풀어놓는 형식인데, 책 앞과 뒤에 각각 ‘주커먼에게’와 ‘로스에게’라는 제목을 단 글이 덧붙여져 있다. 네이선 주커먼은 로스의 소설 여러 편에 로스 자신의 분신으로 등장하는 인물. 그러니까 이 글들은 작가가 작중인물에게 그리고 작중인물이 작가에게 쓰는 편지인 셈으로, <사실들> 본문의 풍부하고 복합적인 해석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로스의 삶과 그의 소설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지만,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서 주목할 대목은 ‘로스에게’ 꼭지 말미에 나온다. “자기 존재의 필수적인 드라마로 보이는 것과 끝없는 분투를 벌이는 등장인물이 사실 저자 측의 신경증적 의식(儀式) 수행에 의해 쓸데없이, 잔혹하게 희생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해보아야 하지.” 로스 특유의 멋 부리는 말투로 조금 꼬여 있긴 하지만, 핵심은 저자의 전횡에 맞서 등장인물 나름의 권리를 주장하겠다는 것. 피란델로 희곡의 등장인물들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창작자와 그의 피조물의 관계란, 특히 예술 작품에서는, 생각처럼 단순하지는 않았다. 멀게는 그리스 신화 속 피그말리온 이야기에서부터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나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같은 소설에 이르기까지 창조자의 손끝에서 빚어진 작품으로서의 피조물이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니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나마 피그말리온 신화에서는 해피엔딩이라 할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하겠지만, <프랑켄슈타인>과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창조자를 포함하는 주요 인물들의 불행한 죽음이 수반되는 비극으로 귀결되고 만다.

이렇듯 착잡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기 십상인데도 작가들이 등장인물의 실존적 조건에 관심을 지니고 끊임없이 그것을 묘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 인간 자체가 절대자의 피조물이 아니라면 적어도 연극 무대의 배우와 같은 존재라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셰익스피어 희곡 <맥베스>의 저 유명한 대사처럼 말이다.

“꺼져라, 꺼져라, 덧없는 촛불이여!/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 가련한 배우일 뿐,/ 제가 맡은 시간에는 무대 위에서 우쭐대고 안달하지만/ 이내 사라져 버려 더 이상 들을 수 없지. 삶이란/ 백치가 떠드는 이야기, 소리와 분노로 가득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다네.”(<맥베스> 5막 5장 23~28행)

최재봉 | 책지성팀 선임기자. 1988년에 한겨레에 들어와 1992년부터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에 충실하며, 문학의 본질과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거울 나라의 작가들> <그 작가, 그 공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악평> <제목은 뭐로 하지?> 등이 있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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