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나는 말에 잘 속아 넘어가는 편이다. 가게 채소 칸에 ‘밤고구마’라 적혀 있으면 분명 당근인데도 ‘햐, 밤고구마가 발그스레한 게 맛있어 보이는군’ 하고 속는다. 어제는 아들이 가으내 해바라기씨를 말려 투명 비닐봉지에 넣어 왔는데 하필 겉에 ‘취나물말림’이라는 스티커가 붙은 걸 보고, ‘말린 취나물이 씨앗처럼 생겼군’ 하며 얼토당토않은 추측을 했더랬다.
말에 속아 판단을 그르치는 것보다 나를 더 좌우하는 건 선입견이다. 선입견은 머리보다는 몸의 기억에 가깝다. 아버지는 각자가 경험한 아버지다. 같은 쥐래도 들쥐는 등골이 오싹해지고 다람쥐는 웃음이 나온다. 바퀴벌레는 4억년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과학자들에겐 관심의 대상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겐 ‘해충’이다. 기독교도들은 기도 중에 (부처가 아닌) 예수를 만나고, 불교도들은 (예수가 아닌) 부처를 만난다. 깊고 깊은 심층에도 선입견이 작용하나 보다.
구름이 사라지면 달이 선명해지듯이, 선입견을 없애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선입견을 없앨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선입견을 가지고 어떤 것을 이해한다(가다머). 선입견은 인간이 세계를 알아가는 방법이다. 개인의 삶의 역사가 쌓여 선입견을 만들고, 이 선입견을 바탕으로 현재를 이해한다. 사회 전체가 공통으로 쌓아올린 선입견을 ‘상식’이라고도 하고 ‘공통기억’, ‘공통감각’, ‘역사’라고도 한다.
투표는 우리의 선입견에 대한 관찰보고서다. 진정한 정치의식은 자신의 선입견을 자각하고 재음미하는 데에서 길러진다. 나는 이 땅의 뭇 생명들과 어떤 삶의 인연을 맺어왔던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