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포스트의 7층 편집국의 내부 풍경. <한겨레> 자료사진
최우성 미디어전략실장
‘민주주의는 어둠 속에서 죽는다’.
2017년 2월,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종이신문 1면과 누리집의 제호 아래 들어갈 슬로건을 발표했습니다. 경쟁지인 <뉴욕 타임스>가 19세기 말부터 무려 100년 넘는 세월 동안 ‘인쇄하기 적합한 모든 뉴스’라는 유명한 문구를 고집해온 것과 달리, <워싱턴 포스트>는 이렇다 할 상징적 문구를 사용한 적이 없었죠. 오랜 전통을 깬 <워싱턴 포스트>의 행보가 세간의 관심을 끈 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지 약 한달 지났을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열쇳말을 내세워 포퓰리즘 성향이 아주 강한 새 대통령을 정면으로 겨눈 게 아니냐고 본 거죠.
이런 시선에 근거가 없진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약 3년 반 전 개인 돈 2억5천만달러를 들여 <워싱턴 포스트>를 사들인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대선 시즌이 막 시동을 걸기 시작한 2015년 무렵부터 트럼프와 앙숙 사이였으니까요. <워싱턴 포스트>가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내자, 트럼프는 “재산을 탕진한 <워싱턴 포스트>는 제프 베이조스가 수익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회사인 아마존의 세금을 낮추기 위한 목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트위터에 한방 날렸습니다. 자부심 강한 신문에 “조세피난처” 딱지를 붙인 거죠. 냉정한 베이조스조차 분을 이기지 못했던지 이번만큼은 홍보팀의 의견을 무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합니다. 당시 베이조스와 홍보팀 사이에 급박하게 오간 아이디어 중엔 “아마존과 <워싱턴 포스트>는 트럼프의 가르마처럼 서로 갈라져 있다”는 표현도 들어 있었다죠. 결국 베이조스는 몇시간 뒤 트위터에 해시태그 #sendDonaldtospace(도널드를 우주로 보내자)를 달아 “블루오리진의 로켓에 그를 위한 자리를 예약해둘 것이다”라고 조롱하듯 맞받아쳤습니다.
하지만 <워싱턴 포스트>의 슬로건 준비 작업은 사실 1년여 전부터 진행돼왔습니다. 빅테크 거물답게 베이조스는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사명을 널리 알리자며 다그쳤다네요. ‘자유는 밝은 빛 속에서 움직인다’ 등 수백개의 후보 가운데, 결국 <워싱턴 포스트>를 상징하는 워터게이트 특종 주역 밥 우드워드 기자의 연설에 담겼던 이 문구가 최종 낙점됐습니다.
서구 레거시 미디어들은 자사의 저널리즘 가치를 천명하는 슬로건에 꽤나 비중을 두는 편입니다. 현재 국내 언론사 가운데 <중앙일보>(‘통합의 가치를 중앙에 두다’)와 <국민일보>(‘진실을 온누리에, 인간을 존엄하게’) 정도가 제호 아래 슬로건을 내건 현실과는 대비되죠. 특히 최근 몇년 사이 국외 레거시 미디어 사이에서 슬로건을 전략적인 브랜드 마케팅 관점에서 접근하는 시도가 부쩍 늘어난 것도 눈에 띕니다. 특정한 단어를 내세워 브랜드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식이죠. <뉴욕 타임스>(Truth·진실), <가디언>(The World is·세상은) 등이 대표적입니다. <뉴욕 타임스>는 진실은 ‘가치 있고’(2018년) ‘힘들고’(2019년) ‘삶의 근원’(2020~2021년)이라고 꾸준히 외칩니다. 독자 가운데 경영자가 많은 <월스트리트 저널>이 신뢰(Trust)란 단어를 열쇳말 삼아 ‘당신의 정보(source)와 당신의 선택(decision)을 신뢰하라’는 문구를 마치 세뇌시키듯 반복 홍보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열흘 뒤면 한국에선 대선이 치러집니다. 두달 뒤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섭니다. 한국 사회를 2030년대의 문턱으로 이끌 5년의 여정이 시작되는 거죠. 친한 지인 몇이서 얼마 전 저녁을 먹던 중 ‘이번 대선에서 노회한 전략가 김종인 카드가 그다지 먹히지 않는 건, 아마도 이렇다 할 시대정신 자체를 정의하기 어렵다는 방증 아닐까’란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무너지고 쪼개지고 곪아터진, 조롱과 분열과 상처만 가득한 한국 사회 현실에서, 독자 여러분께선 <한겨레>의 나침반으로 어떤 문구나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베이조스는 2015년 9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어떤 기업이든 종말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징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영광을 미화하는 것입니다.” 멋진 슬로건이 됐건 탁월한 브랜드 전략이 됐건, <한겨레> 저널리즘의 사명을 다시 새겨보는 감수성의 발원지는 ‘지금, 여기’여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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