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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윤석열 포퓰리즘’에 맞서는 법 / 이세영

등록 2022-03-17 16:14수정 2022-03-18 02:01

뱅크시 벽화 Follow Your Dreams: Cancelled, 2010.
뱅크시 벽화 Follow Your Dreams: Cancelled, 2010.

이세영 ㅣ 논설위원

내전은 끝났다. 윤석열이 이겼다. 하지만 윤석열은 ‘이름’일 뿐, 진짜 승자는 따로 있다. ‘우파 포퓰리즘’이다.

선거 기간 이재명과 윤석열이 벌인 포퓰리스트 공방을 기억한다. 산업화, 민주화에 이어 선진화까지 성취한 아시아 모범국가의 대선 레이스에서 집권당과 제1야당의 유력 후보끼리 서로를 포퓰리스트라 낙인찍어 공방하는 모습은 낯설다 못해 희극적이었다. 하지만 ‘포퓰리스트 대선’은 21세기 한국 정치를 넘어 지구 정치 일반의 숙명이다. 지금은 행성 전체에 온갖 병적 징후가 창궐하는 정치적 대공위시대(Interregnum), 포퓰리즘 국면(Populist Moment)이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은 다양한 사회 집단의 불만과 요구를 특정한 가치나 슬로건, 지도자의 이름 아래 묶고, 이를 통해 낡은 지배 질서에 맞설 정치적 주체(국민·인민)와 집단 의지를 만들어내는 전략적 실천을 가리킨다. 그러니 거기엔 좌·우파의 판본이 모두 있다. 이 전략의 핵심은 ‘적’이 누구인지를 규정하고 ‘그들’(적)과 ‘우리’ 사이에 정치적 경계를 긋는 일이다. 윤석열의 선거 캠페인은 이런 포퓰리즘 전략에 충실했다. 

‘윤석열의 이름’ 아래 모인 우파 세력이 대선의 핵심 가치로 내세운 건 공정과 상식, 법치의 회복이었다. 하나같이 문재인 정부가 결핍하거나 배반했다고 간주된 ‘공백’과 ‘결손’의 지점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그들은 ‘약탈세력’ 대 ‘국민’으로 사회를 분할했다. 약탈세력은 리버럴 성향의 86세대 정치인과 민주노총으로 상징되는 정규직 노조, 페미니스트, 진보 시민단체, 성소수자와 이주노동자 등 윤석열과 주변 세력이 강한 적대감을 표출해온 집단이다. 그런 다음 이 약탈세력을 제외한 모든 이를 ‘국민’으로 호명하고 제 편에 끌어모았다. ‘국민’의 핵심은 고액 납세자, 자산계급, 극우 노인층, 20~30대 남성, 전통적 보수유권자, 양극화로 직격탄을 맞은 취약계층이었다.

전선을 긋고 결집의 강도를 끌어올리는 건 다음 수순. 노인과 전통 보수층에는 북한과 좌파 정치세력을, 20~30대 남성 등 사회경제적 좌절을 겪은 집단에는 정규직 노조와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를, 종합부동산세와 고액 재산세 납부자에겐 무능하면서 위선적인 86세대 리버럴 엘리트를 대립시켜 지지를 구축했다. 결과는 0.73%포인트 격차의 초박빙 승리였다.

이재명과 민주당의 패인은 문재인 정부의 통치 실패에 더해, 윤석열의 우파 포퓰리즘에 대항할 효과적인 담론과 전략을 만들어내지 못한 데 있었다. 2019년 ‘조국 사태’가 초래한 ‘반기득권 포퓰리스트 연합’(촛불 동맹)의 붕괴가 그들로부터 포퓰리즘의 언어 자원을 박탈해버린 게 치명적이었다. 그들이 윤석열의 포퓰리즘에 맞서 꺼내들 수 있는 카드는 ‘종말론’이 유일했다.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는 무뢰배의 반혁명으로부터 촛불의 성과물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우호세력의 공포를 동원하는 것만으로 판세를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포퓰리즘은 집권 전략으로는 효과적이지만, 통치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현행 질서를 비판하며 대항 세력을 규합하는 것과, 국가 공동체를 운영하는 일은 엄연히 다른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석열의 포퓰리즘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예단하긴 쉽지 않다. 확실한 건 통치가 위기에 직면하면 그 책임을 바깥의 적이나 내부의 타자들에게 전가해 정치적 궁지에서 벗어나려는 우파 포퓰리즘의 관성이 어김없이 되살아나리란 사실이다.

진보와 리버럴의 성패는 결국 배외주의와 소수자 혐오, 민주화 전통과 민주적 가치에 대한 조롱으로 분출되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불안과 불만이 민주주의와 인권, 평등의 가치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전환될 수 있게 얼마나 정교한 담론적 개입 전략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에 달렸다. 이때 중요한 게 익숙한 기존의 해석 언어와는 다른 언어를 대중에게 제공하는 일이다. 대중의 정치적 선택은 항상 현실을 경험하고 해석하는 언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낙오자로 여기는 ‘을’들의 좌절감과 정치적 인정 욕망이 같은 처지의 ‘을’들을 향한 배제와 혐오의 언어가 아니라, 삶의 위기에 책임 있는 ‘갑’들을 겨냥하는 정치 언어로 분출되게 해야 한다. 그게 윤석열의 포퓰리즘에 맞서는 진보와 리버럴의 포퓰리즘이다.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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