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의 탐문] _13 삐딱하게 읽기
작품에 관한 최종 권위가 창작자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보통의 독자들이 지니고 있는 미신에 불과하다. 작가 자신의 의도와 다른 작품 해석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기도 하다는 것은 유구하게 전개되어 온 주장이다. 이른바 ‘의도의 오류’를 앞세워, 창작자가 의도한 의미와 작품에 실제로 구현된 의미를 구분하려 한 미국의 신비평 이론이 대표적이다.
피에르 바야르라는 프랑스의 문학비평가를 아시는지? 그의 책들은 10여년 전에 여러 권이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는데,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 같은 제목에서 보듯 한결같이 삐딱하고 독창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예상 표절>이라는 책에서는 표절에 관한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뒤집어, 선행 작가가 미래에 출현할 작가의 작품을 미리 표절할 수도 있다는 전복적인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아마도 보통의 독자들에게 가장 친근하고 솔깃하게 다가올 그의 생각들은 이른바 ‘추리비평 삼부작’으로 일컬어지는 <햄릿을 수사한다>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셜록 홈즈가 틀렸다>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추리비평’이란 추리소설의 범죄 해결 과정과 결론을 문제 삼고 원작과는 다른 범인을 추리해 내는 비평을 말한다. 앞서 언급한 삼부작은 각각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애거사 크리스티, 아서 코넌 도일이 자신의 작품 속 살인 사건 범인을 잘못 지목했다고 비판하며 바야르 자신이 혐의를 두는 ‘진범’을 제시한다. 이 가운데 <셜록 홈즈가 틀렸다>는 도일의 소설 <바스커빌가의 개>를 대상으로 삼는데, 바야르는 이 작품만이 아니라 탐정 셜록 홈스가 등장하는 도일의 다른 많은 작품 역시 그릇된 추리와 빗나간 수사의 사례를 보인다고 비판한다.
<바스커빌가의 개>는 황량한 시골 저택의 주인이 주검으로 발견된 사건을 홈스가 해결하는 과정을 담았다. 그런데 바야르는 홈스가 엉뚱한 범인을 지목함으로써 “한 세기도 넘게 텍스트 속에 은둔해 있는, 문학 역사상 가장 악마적인 살인자 가운데 한 사람을 감춰주고 있”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그 진범의 정체를 스릴 넘치게 추리해 가는 과정이 곧 <셜록 홈즈가 틀렸다>인데, 그런 점에서는 이 책 자체를 또 하나의 추리소설로 읽을 수도 있겠다.
<햄릿>의 핵심을 이루는 사건 역시 바야르의 추리비평을 거치면 전혀 다른 면모를 보인다. 햄릿의 부친인 선왕을 그 동생인 클로디어스가 살해하고 형수인 거트루드와 결혼한 데 대해 햄릿이 복수를 한다는 것이 우리가 아는 <햄릿>의 얼개인데, 바야르는 사건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독자가 책에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좋겠거니와,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세계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일 이 희곡의 기본 전제를 두고 다채로운 해석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햄릿을 동성애자로 이해하는 견해에서부터 그가 사실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든가, 클로디어스가 형의 귀에 부어 넣은 독이 실제 독극물이 아니라 말로 된 독(‘형수님은 형님의 아내가 아니라 제 아내이고, 햄릿 역시 형님의 아들이 아니라 제 아들입니다’)이었다는 가설이 대표적이다.
그런 가정은 물론 셰익스피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오늘의 논점이 바로 그와 관련된다. 그러니까, 독자는 반드시 작가가 의도한 대로만 작품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작품에 관한 최종 권위가 창작자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보통의 독자들이 지니고 있는 미신에 불과하다. 작가 자신의 의도와 다른 작품 해석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기도 하다는 것은 바야르 이전에도 유구하게 전개되어 온 주장이다. 이른바 ‘의도의 오류’를 앞세워, 창작자가 의도한 의미와 작품에 실제로 구현된 의미를 구분하려 한 미국의 신비평 이론이 대표적이다. 야우스와 이저 같은 독일 문학 이론가들이 발전시킨 수용미학은 고정된 의미를 지닌 ‘작품’ 대신 의미 산출을 위한 매개체로서 ‘텍스트’라는 개념을 선호했다.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아예 ‘저자의 죽음’이라는 글에서 작가를 작품을 낳은 아버지로 보는 낡은 관념을 파기하고, 저자를 한갓 필사자의 위치로 끌어내리며, 의미의 최종 구현자로서 새로운 독자의 탄생을 주창한다.
바르트가 생각하는 독자의 주체적·능동적 역할과 관련해 특히 주목할 만한 개념이 ‘읽히는 텍스트’와 ‘쓰이는 텍스트’라는 것이다. 의미가 고정되어 있어서 독자의 참여와 개입을 차단하는 텍스트가 ‘읽히는 텍스트’고, 유동적이며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살아 있는 텍스트가 ‘쓰이는 텍스트’다. 새로운 독자는 저자가 텍스트에 부여해 놓은 의미에 갇히지 말고 그 자신이 또 다른 저자가 되어 텍스트를 다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 소설가 앤절라 카터 역시 아래와 같은 말로써 독서를 일종의 다시 쓰기(re-writing)로 파악한 바 있다.
“책을 읽는 일은 그 책을 독자 스스로 다시 쓰는 것과 같다. 내 생각에 모든 소설의 결말은 열려 있다. 독자는 그가 읽은 모든 것, 그의 모든 세계 경험을 소설에 들여온다.”
그렇다면 가령 서포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을 새로 쓴다면 어떠할까. 이 작품은 성실한 불제자였던 성진이 세속의 쾌락과 부귀영화를 탐한 죄로 선계에서 쫓겨나 현세의 시골 선비 양소유로 환생한 뒤, 온갖 영예와 즐거움을 만끽한 끝에 그것이 모두 하룻밤 꿈이었음을 깨닫는 액자 구조로 되어 있다. <삼국유사> 중 ‘조신의 꿈’ 이야기를 그 원형으로 볼 수 있는데, 현세의 부귀영화란 덧없는 것일 뿐이라는 불교의 공(空) 사상을 담은 작품이라 하겠다. 그러나 <구운몽>을 실제로 읽어 보면 작품의 9할 남짓은 양소유의 현세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고, 성진의 꿈이라는 진짜(?) 이야기는 나머지 1할 정도에 그칠 뿐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구도자 성진의 꿈 이야기라는 액자가 아니라 양소유의 화려한 생애를 예찬하는 쾌락주의가 이 소설의 핵심이라는 본말전도 식의 독법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같은 맥락에서 ‘허생전’을 허생이 아닌 허생 처의 입장에서, 흥부전을 흥부가 아닌 놀부의 입장에서 다시 쓰는 것 역시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식민 개척자가 아닌 피식민지 주민의 세계관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쓴 미셸 투르니에의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역시 다시 쓰기라는 적극적·능동적 독서의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저항적 독서’(resistant reading)라는 딱딱한 말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주체적이며 비판적인 독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저자의 의도를 비롯해 특정 텍스트에 대한 기존의 지배적인 해석에 반기를 들고 새롭고 전복적인 해석을 제출하는 독법으로, ‘버텨 읽기’라는 우리말 표현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저항적’이라는 말에서 짐작되듯 이런 독서 방식은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를 비롯한 대안적 비평에서 즐겨 동원된다. 기왕의 작품 해석에 깃든 남성중심주의나 백인 우월주의에 맞서 성 및 인종 평등주의적 관점에서 작품을 새롭게 보도록 하는 것이다. 텍스트가 감추거나 누락시킨 의미를 캐내는 ‘징후적 독법’, 또는 텍스트가 표층적 의미를 스스로 배반한다는 것을 밝혀내는 ‘해체적 독법’이 비슷한 개념이다.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에요.”
영화 <일 포스티노>의 원작인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 우편배달부 마리오는 대시인 네루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골 청년 마리오의 이 말은 곧 바야르와 바르트 같은 고급 문학 이론가들의 주장을 자신만의 소박한 언어로 바꾸어 표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읽어도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독자의 주체적 독법에는 나름의 근거와 설명이 따라야 한다. 그리고 이런 독법은 작품을 더 풍요롭게 이해하고 그런 이해 위에서 세상을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데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2011년 4월 한국을 방문한 피에르 바야르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그런 독법을 가리켜 ‘개입주의 비평’이라고 표현했다. “독자가 텍스트 앞에서 수동적이고 무기력하게 있지 않고, 작품에 개입해서 변형을 가하고 그 결과 더욱 공정한 세상에 적합하게 만드는 비평”이 그가 말하는 개입주의 비평이다. “문학작품을 비롯한 텍스트 주위에는 수많은 잠재적 텍스트, 또는 유령 텍스트가 있다. 기존의 텍스트를 불완전하고 유동적인 실체라고 가정하고, 그 안에 감추어진 잠재적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려는 것이 개입주의 비평”이라고 그는 부연했다. 저항적 독서, 버텨 읽기, 개입주의 비평…. 그것을 어떤 말로 표현하든, 독자 역시 안온하고 무기력한 텍스트 소비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주체적이며 생산적인 독서를 해야 한다는 당위만큼은 분명하다 하겠다.
최재봉 | 책지성팀 선임기자
1988년에 한겨레에 들어와 1992년부터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에 충실하며, 문학의 본질과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거울 나라의 작가들> <그 작가, 그 공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악평> <제목은 뭐로 하지?> 등이 있다.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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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한겨레에 들어와 1992년부터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에 충실하며, 문학의 본질과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거울 나라의 작가들> <그 작가, 그 공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악평> <제목은 뭐로 하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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