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우용 |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니 자정이 됐다. 식사를 하고 오라는 관리자들의 목소리가 일터 전체에 퍼졌다. 그 소리와 함께 컨베이어 벨트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식사 시간은 50분이었으며,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서 먹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두 번째는 빵 하나와 우유를 지급받아 먹는 방법, 세 번째는 역시 컵라면 하나와 밥 한 공기를 받아먹는 방법이었다. 빵과 우유를 먹었다면, 컵라면과 밥은 먹을 수 없다.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나는 구내식당을 선택했다. 차갑고 딱딱한 생선가스와 충분하지 않은 밥의 양, 그나마 너무 지쳐 밥이 목구멍으로 잘 들어가지도 않았다. 여기선 어떤 방법으로 끼니를 채우든 나의 일급에서 7000원이 제외된다. 그런데 세 가지 방법 중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밥을 안 먹어도 7000원이 빠진다고 한다.
밥을 대충 때우고 일터로 복귀했다. 내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흡연부스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 탈진한 채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사람 등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한 이들의 얼굴을 비로소 찬찬히 살폈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자격 요건’은 어떤 것이길래 나이대가 제각각인 이들은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채 이토록 험한 일을 하는 것일까. 밤하늘의 별까지의 거리가 유독 멀게 느껴진 날이었다.
다시 컨베이어 벨트가 돌기 시작했고, 택배들이 쏟아졌다. 첫날인데다 몇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옆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이 지속적으로 도움을 줘서 제법 요령이 붙었다. 요일마다 다르지만, 보통 상차는 하루에 10대 안팎의 트럭을 채우면 일이 끝난다고 했다. 일을 하다 보니, 갑자기 물류센터에서 일용직 노동자가 죽고, 택배 배달기사가 과로사했다는 기사들이 뇌리를 스쳤다. 살인적인 노동강도를 직접 체감하고서야 왜 택배 노동자들이 그렇게 많이 죽어 나가는지 뒤늦게 이해하게 됐다. 잠시 외면했던 분노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다음 날 오전 7시30분이 되어서야 모든 컨베이어 벨트가 작동을 멈췄다. 오늘 할당량을 다 채웠다는 관리자의 말과 함께 나의 첫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가 끝났다. 일을 마친 내 몸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허리는 거의 박살 난 느낌이었고, 기운이 다 빠져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다시 대구로 돌아가는 통근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관리자 중 한 명이 오늘 일급은 오후 중으로 지급된다고 알려줬다. 대전에 있는 C사로 출근할 때는 통근버스가 만석이었지만, 퇴근할 때엔 빈자리가 많이 보였다. 나는 앉자마자 쓰러지듯 잠에 빠졌다. 대구에 도착하니 오전 9시10분쯤, 고시원에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더 깊은 잠에 빠졌다.
오후가 되어 일어나려 했는데 허리를 거의 움직일 수 없었다. 근육통이 온몸을 지배했다. 간신히 은행계좌부터 확인해봤다. 세금과 식비를 제외한 11만8267원이 들어와 있었다. 전날 오후 6시30분부터 다음 날 오전 7시30분까지, 남들 다 쉬는 야간에 일한 대가였다. 물론 야간근로수당 등은 전혀 없었지만, 당장 받을 수 있는 돈만 보면 그게 또 적은 금액은 아니어서 그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음 날에도 출근하겠다는 메시지를 반장님한테 보냈다.
평균 12만~13만원의 일급을 받으면서, 거의 매일 택배 상하차 일을 했다. 방학 동안 그렇게 돈을 모아 대학 등록금에 보탰다. 2020년 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알바 자리가 사라진 터라, 나는 지금까지도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꾸준히 하고 있다. 지난 2년여 동안 택배 상자와 함께 내 인생도 실어 나른 것이다.
택배 상하차 일을 시작하며 내 인생이 초라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솔직히 비정규직과 일용직 등 현장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마냥 좋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다. 나부터 그들을 바라볼 때 ‘과거에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들을 낮잡아 보는 마음도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물류센터에 도착한 첫날 비로소 깨달았다. 비정규직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그리고 택배 노동자의 고된 노동 덕분에 우리 모두가 그동안 편리한 삶을 영위해왔다는 사실을.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에 대한 처우는 여전히 열악하다. 정규직의 갑질, 먼저 일을 시작한 장기 알바의 텃세 등 여전히 개선해야 할 구석도 많다. 이는 노동자만 노력한다고 바뀌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런 현실에 관심을 갖고 함께 목소리를 내주어야 한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지난해 연 ‘11회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응모작입니다. 다음주에는 다른 수기가 실립니다. <한겨레>는 해마다 수상작 등 응모작 일부를 게재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