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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필터가 떨어졌다

등록 2022-04-21 18:06수정 2022-04-22 02:37

[삶의 창] 이명석 | 문화비평가

없으면 안 돼. 절실한 손가락이 절박하게 찬장을 뒤지다 절망으로 문을 닫았다. 고된 며칠을 보낸 나는 하루 종일 집에서 쉴 작정이었다. 맺힌 피로를 풀려고 커피 원두를 갈고 드리퍼를 내놓고 물을 데웠는데, 그만 필터가 똑 떨어졌다. 어딘가 근처 카페에 파는 곳이 있겠지? 하지만 수만 수십만 확진자가 쏟아지는 때에 이런 약한 몸으로 돌아다니면 안 돼. 이럴 때만 단호해지는 게으름뱅이는 문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처음은 아니었다. 예전엔 <걸리버 여행기>의 잭 블랙을 따라 키친타월에 커피를 내렸지. 그러곤 완벽하게 향과 풍미를 제거한 뜨뜻한 검은 물을 마셔야 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순 없다. <캐스트 어웨이>에서 톰 행크스가 스케이트 끈으로 상처를 묶고 날로 코코넛을 쪼개던 지혜가 필요했다. 티슈나 두루마리 휴지는 얇아서 실격. 차 거름망과 멸치 우리는 망은 구멍이 컸다. 맞아. 융 드립이라는 게 있지. 싱가포르에선 양말로 내리잖아. 하지만 헌 양말은 더럽고 새 양말은 아까웠다. 그러다 문구 박람회에서 챙겨온 종이 샘플 뭉치를 찾았다.

마침 적당한 질감의 종이가 있었다. 드리퍼에 맞춰 자르고 깔때기 모양으로 돌려 붙였다. 간 원두를 넣고 물을 부으니 적절한 속도로 자연스럽게 내려왔다. 진하고 강렬한 맛에 머리가 확 깨어났다. 그런데 두 시간 뒤 나는 침대에 뻗어 일어나지 못했다. 입에선 쓴맛이 사라지지 않았고 위장은 뻣뻣하고 답답해 피로감이 극에 달했다. 그러고 보니 터키 커피를 만든답시고 가루를 물에 넣고 끓였을 때와 비슷한데? 잔을 들여다보니 커피 가루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잠과 꿈의 필터를 거친 뒤, 나는 이 거무튀튀한 하루로부터 약간의 교훈을 걸러냈다. 어설픈 아마추어의 재치로 프로들의 발명품에 덤비지 말라. 게으름뱅이의 핑계는 스스로 굶어 죽게 하는 덫이다. 필터, 필요 없는 걸 걸러내고 필요한 것만 내보내는 적절한 투과의 기술은 예술과 다름없다. 나는 집 안의 모든 필터를 점검했다. 전기청소기, 공기청정기, 에어컨을 들추어 씻고 갈았다. 먼지 낀 방충망과 뻑뻑한 욕조의 거름망도 청소했다.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공원에 가서 숲의 필터를 거친 공기로 폐의 필터를 씻었다. 그리고 개운한 마음으로 커피 필터를 찾아 나섰다.

어느 카페의 진열장에서 필터를 발견하고 들어서는데 어떤 소란이 계산대 앞을 꽉 막고 있었다. 누군가 마스크를 아랫입술까지 내리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불만에 직원의 실수가 더해진 듯한데, 그것과는 관계없는 자기 삶의 모든 비애를 토해내고 있었다. “내가 와이프 등쌀에 차 막히는데 나와서, 그놈의 커피가 뭐가 대단하다고, 사람을 괄시하고 말이야.” 요즘 이런 사람들을 자주 목격한다. 주차 시비가 생긴 골목길, 관공서의 민원 창구, 인터넷 뉴스의 댓글 창에서 필터 없이 오물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주인이 직원을 물러나게 하고 손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직업의 어려움이다. 오는 손님도 그들의 말도 가려 받을 수 없다. 불만이든 충고든 의견이든 다 받아내야 한다. 보통은 다슬기처럼 귀의 뚜껑을 딱 닫았다가 ‘할 말 다 하셨으면’ 하고 내보낸다. 하지만 이 사람은 달랐다. 차분히 모든 말을 들은 뒤 가게의 잘못인 것과 아닌 것을 걸러냈고, 부족한 점을 사과했지만 부당한 지적엔 아니라고 했다. 상대는 기가 죽었다. 다시 말을 얹으려는 걸 부인이 부끄러워하며 말리고 나갔다.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주인은 내 쪽으로 돌아서며 표정의 필터를 갈았다. “뭘 드릴까요?” 필터 한 뭉치만 사서 나가려던 나는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이처럼 훌륭한 필터를 가진 사람, 그가 내려주는 커피를 마셔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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