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의 탐문] _14 소년모험소설
소년·소녀들의 호기심과 모험심을 자극하는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며 아이들은 자라서, 피터 팬과 달리, 어른이 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이따금씩 마음속으로 흐느껴 운다.
요즘은 사정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지난 시절 어린 독자들에게 미지의 장소를 찾아 떠나는 모험이야기는 퍽 인기가 높았다. 소년기라는 게 무한히 열려 있는 가능성의 시기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생의 본질이 곧 모험이기 때문일까. <보물섬>이나 <15 소년 표류기>처럼 표류와 뜻밖의 발견을 소재로 삼은 소설에 어린이들은 매료되었다.
주로 남자아이들이 등장해 낯선 장소에서 모험을 펼치는 이런 이야기를 ‘소년모험소설’이라 부르기로 하자. <보물섬>(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나 <15 소년 표류기>(쥘 베른)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로버트 밸런타인의 <산호섬> 역시 같은 계열에 속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윌리엄 골딩의 대표작 <파리대왕>에 이 작품의 영향이 짙게 배었다. 이 네 작품은 모두 소년(들)이 낯선 섬에 표착해 위험과 위기에 맞서며 그 땅을 문명인이 살기에 적합한 곳으로 만들고자 고투하는 과정을 그린다. 짐작하겠지만 이런 설정은 대니얼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 기원을 두고 있다.
같은 표착기라고는 해도 이 작품들 사이에는 공통점에 못지않게 차이점도 적지 않다. 폭풍우를 만나 남태평양의 외딴섬에 도착한 세 소년이 불과 식수 및 식량을 확보하고 식인종의 위협에 맞서며 원주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려 하는 것이 <산호섬>의 대강의 줄거리다. ‘진취적 기상’으로 미화되는 제국주의의 팽창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로빈슨 크루소>에 곧바로 이어진다.
<로빈슨 크루소>에서 하나였던 표류자가 <산호섬>에서는 셋이 되더니, <15 소년 표류기>에서는 15명으로 크게 늘고 연령대는 더 낮아진다. 뉴질랜드에서 출발한 범선에 탄 소년들의 나이는 여덟살에서 열네살 사이. 이들이 낯선 섬을 ‘식민지’라 부르며 섬 곳곳에 자기들 나름으로 이름을 붙이는 모습은 영락없이 식민개척자인 제 조상들을 닮았다. 자신들에 이어 섬에 표착한 미국인 가정부를 ‘프라이데이 아줌마’로 부르는 데에서는 <로빈슨 크루소>의 강력한 영향이 보인다.
<보물섬>은 해적 출신 인물이 지니고 있던 지도를 내비게이션 삼아 보물이 묻힌 섬을 찾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인데, 아이로는 유일하게 항해에 동행한 짐 호킨스가 겪는 모험이 중심을 이룬다. 동료 선원 여럿이 목숨을 잃고 일부는 섬에 버려지는 모험 끝에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짐은 “황소들이 짐마차 끈으로 끌어당긴다고 해도 나는 그 저주받은 섬에는 절대로 다시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오히려 보물섬과 같은 미지의 땅과 그 땅이 약속하는 모험에 대한 매혹을 반어적으로 강조하는 것처럼 들린다.
<파리대왕> 도입부에서 핵전쟁 뒤 비행기로 후송되다가 무인도에 불시착한 소년들은 자신들이 놓인 상황을 두고 “<보물섬> 같아”라거나 “<산호섬> 같아”라며 중구난방으로 떠든다. 이 소설의 두 핵심 인물 랠프와 잭은 <산호섬>의 세 소년 중 둘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선거에서 대장으로 뽑힌 랠프에게 낙선한 잭이 반기를 드는 설정은 <15 소년 표류기>에 빚지고 있는 셈인데, <15 소년 표류기>가 결국 두 소년의 화해로 마무리되는 것과 달리 <파리대왕>에서 둘의 갈등은 점점 더 증폭되고 마침내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또 <15 소년 표류기>에서 아이들이 문명 세계의 도구들과 윤리규범 덕분에 원시의 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파리대왕>에서는 문명의 족쇄에서 벗어난 아이들이 야만적 폭력과 짐승 같은 본성으로 치달아 가는 과정이 섬뜩하게 그려진다.
“아이는 모두 자라 어른이 된다. 한 아이만 빼고.”
제임스 매슈 배리의 <피터 팬> 첫 문장은 이 소설의 핵심을 단단하게 움켜쥐고 있다. “나는 절대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나는 영원히 어린아이로 남아 재미있게 살고 싶어”라는 말에서 보다시피 피터는 어른 되기를 마다하고 언제까지나 아이로 남아 있고자 한다. 그 까닭으로 그가 ‘재미’를 든다는 데에 주목해 보자. 그가 생각하기에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재미와 담쌓고 따분한 의무와 격식에 얽매이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집에서 도망친 피터가 친구들과 매일같이 재미있는 모험을 즐기는 곳이 ‘네버랜드’라는 가상의 공간이다(이곳은 그러니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무대인 ‘이상한 나라’ 원더랜드의 다른 이름인 셈이고, 네버랜드나 원더랜드란 현실원칙의 지배에서 벗어나 쾌락원칙이 허용되는 곳이라는 점에서 이야기 또는 문학과 예술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네버랜드에서 피터의 적수는 쇠갈고리 손을 한 후크 선장인데, 그는 <보물섬>에 나왔던 외다리 선원 롱 존 실버 및 플린트 선장과 관련이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죽는 건 정말 짜릿한 모험이 될 거야”라고 말할 정도로 모험에 들린 피터는 후크 선장과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치며 하루하루를 신나는 모험으로 채우지만, 그와 모험을 함께했던 웬디 남매는 이윽고 네버랜드를 떠나고, 어른이 된다. 여전히 어린 소년인 피터가 이제 어른이 된 웬디를 다시 만나서는 “바닥에 앉아 흐느껴” 우는 장면은, 구제할 수 없는 어른이 되어 이 책을 다시 읽는 독자의 마음을 찢어 놓는 듯하다.
<피터 팬>이 어른의 세계와 아이들 세계 사이의 화해 불가능한 대립 위에 서 있는 반면,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의 모험>은 아이들 세계의 무책임과 미성숙이 초래하는 위험을 경고하며 어른 세계의 규범에 순종하는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장난감을 가지고 신나게 놀”기만 하는 ‘장난감 나라’란 네버랜드나 원더랜드와는 달리 다만 치기 어린 혼란과 무질서가 지배하는 함정과도 같은 공간이다.
마크 트웨인의 연작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미시시피강 연안에 사는 두 소년 톰과 허클베리(허크)의 일상 속 모험을 그린다. 두 소년이 해적이 되고 보물을 발견하는 꿈을 꾸며 악당들에 맞서는 모습은 <보물섬>과 <15 소년 표류기>를 떠오르게도 한다.
“정상적인 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어디엔지 모를 곳에 숨어 있는 보물을 파내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히는 때가 있게 마련이다.”
<톰 소여…>의 이런 대목은 소년모험담이 지니는 보편적인 매력을 알게 한다. 이 작품에서 톰과 허크는 강 한복판 섬을 무대로 모험을 펼치고 보물 상자를 발견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허클베리 핀…>은 허크가 도망친 흑인 노예 짐과 함께 뗏목을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가며 겪는 일들을 피카레스크(악한 소설, 건달 소설) 방식으로 엮는다. 뗏목에 실려 가는 도중 발견한 난파선을 수색할 때 허크는 “톰은 이걸 모험이라고 부를 거야”라며 톰과 모험을 함께 떠올리거니와, 여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모험을 향한 톰의 지독한 집착이다. 이 소설에서 핵심적인 사건은 도망쳤다가 붙잡힌 짐을 자유의 몸이 되도록 하는 일인데, 당사자인 짐은 물론 허크 역시 짐의 탈출이라는 목표를 우선시하는 것과 달리 톰은 짐의 탈출극이라는 모험을 가능한 한 복잡하고 짜릿하게 꾸미는 데에 주력한다.
“난 커서 해적이 될 거야. 너희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소설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의 마지막 문장이다. 20세기 중반 북유럽의 소녀조차도 해적을 꿈꾼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씩씩한 소녀 삐삐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선장이었던 아버지도 사고로 숨진 뒤 혼자서 살고 있지만, 그 자신만은 어디까지나 아버지가 침몰한 배에서 헤엄을 쳐서는 “식인종 섬에 도착해서 식인종의 왕이 되어 황금 왕관을 쓰고 하루 종일 어슬렁거릴 거라고” 믿는다. 학교에 다니거나 시설의 보호를 받기를 거부하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며 크고 작은 모험을 즐기는 삐삐의 삶은 특히 소녀 독자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응원을 끌어냈다.
소년·소녀들의 호기심과 모험심을 자극하는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며 아이들은 자라서, 피터 팬과 달리, 어른이 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이따금씩 마음속으로 흐느껴 운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파블로 네루다 시집 <질문의 책>에 실린 44번 시의 첫 대목이다. 어린이날 100돌을 앞두고 어린 시절의 독서 목록을 다시 꺼내 보는 동안 네루다의 이 시가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최재봉ㅣ책지성팀 선임기자
1988년에 한겨레에 들어와 1992년부터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에 충실하며, 문학의 본질과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거울 나라의 작가들> <그 작가, 그 공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악평> <제목은 뭐로 하지?> 등이 있다.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