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젠더 차이를 고려하지 않을 때 연구개발은 편향된 결과를 낳을 수 있고 지식과 기술의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오른쪽 위 사진은 현대기아차 남양기술연구소의 자동차 충돌시험에 쓰이는 남녀와 어른·어린이 인체 규격의 다양한 더미들이다. <한겨레> 자료사진·그림, 게티이미지뱅크
오철우 | 서울과학기술대 강사(과학기술학)
얼마 전 과학저널 <네이처>는 논문을 투고할 때 갖춰야 하는 요건을 강화하는 새로운 논문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임상시험 참여자나 실험동물, 세포를 다룰 때 성별과 젠더별로 구분해 밝히라는 요건이다. 세포 실험을 했다면 세포 성별을 밝히고 동물실험에서는 암수컷별로 분석 결과를 구분하라는 얘기다. <네이처>는 따로 사설을 실어 성·젠더 차이를 고려하는 연구가 과학을 더욱 정확하게 만들 것으로 기대하며 이런 요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연구 설계와 실험, 분석 단계에서 연구 대상을 성별, 젠더별로 나누어 살펴야 한다는 목소리는 지난 10여년 동안 과학계에서 빠르게 커졌다. 2009년 미국 스탠퍼드대학 몇몇 연구자들이 과학연구에 스며 있는 성·젠더 편향을 지적하며 성·젠더 차이를 생각할 줄 아는 더 나은 과학으로 혁신하자는 ‘젠더혁신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13년 만이다.
수컷 중심의 동물실험과 남성 위주의 임상시험으로 인해 여성에게 부작용이 큰 약물들의 문제가 주목받았고, 검은 피부의 여성 얼굴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인공지능(AI) 편향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성별에 따라 다른 약물 반응을 생각하지 못하고 데이터에 담긴 젠더 편향을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이 과잉 또는 과소 대표될 때, 과학기술에는 뜻하지 않은 편향의 결과물이 스며든다.
<네이처>의 가이드라인을 보면, 앞으로 네이처 자매 학술지들에 논문을 싣고자 하는 연구자는 사람이나 척추동물, 세포를 대상으로 연구할 때 성·젠더 차이를 어떻게 다뤘는지를 밝혀야 한다. 그런 고려가 없었다면 그 이유를 정당하게 설명해야 한다. 불가피하게 하나의 성만을 다루었다면 그 사실을 논문 제목과 초록에 명시해야 한다.
이런 가이드라인을 과학저널 가운데 <네이처>가 처음 시행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153년 역사를 가진 대표적인 과학저널의 가이드라인은 연구 현장에 상당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것이기에 주목할 만하다. 다른 학술지들이 이런 흐름을 뒤따르면 과학기술 연구개발에서 젠더 혁신의 발걸음은 더 빨라지지 않을까.
코로나19 증세가 남녀별로 어떻게 왜 다른지 다루는 연구들이 주목받았듯이, 이미 건강과 의학 분야에서는 성·젠더 차이에 주목하는 연구들이 많이 늘어났고, 근래에는 인공지능과 로봇은 물론이고 자동차, 대중교통, 도시설계 같은 분야에서도 성·젠더별 분석 시도와 성과가 나오고 있다. 남녀 차이를 고려하는 자율주행 자동차 설계에 관한 뉴스에도 이런 흐름이 반영돼 있다. <네이처>의 가이드라인은 연구자들의 성·젠더 평등뿐 아니라 과학 연구 방법의 성·젠더 평등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