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진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담는 것처럼 보이지만, ‘크기’는 담지 못한다. 카메라를 개미에 바짝 붙여 찍으면 코끼리보다 크고, 코끼리를 멀찌감치 떨어뜨려 찍으면 개미보다 작게 보인다. 그래서 범죄 현장에서 찾은 증거물은 항상 자를 옆에 놓고 찍는다.
세상 모든 척도가 미터와 그램, 리터로 통일된 듯하다. ‘배럴, 갤런, 파운드’처럼 낯선 단위를 만나면 가늠이 되지 않는 걸 보면 더 그렇다(허리둘레나 텔레비전 크기를 말할 땐 ‘인치’를, 골프에선 ‘야드’를 쓰긴 하더라…).
그러나 미터법과 같은 보편적인 척도를 배우기 전에도 우리는 이 세계를 ‘쟀다’. 그 기준은 몸이다. 새로 난 떡잎은 손톱만 하고, 복숭아는 어른 주먹만 하며, 가지는 팔뚝만 하고, 호박은 머리통만 하다고 한다. 아이스크림 한 ‘입’에 얼음물 한 ‘모금’만 마실 수 있다면 이 더위를 식힐 수 있으련만. ‘뼘’은 엄지손가락과 집게나 새끼손가락을 힘껏 벌려 잰 길이이고, ‘움큼’이나 ‘줌’은 주먹으로 쥘 만한 양이다. ‘아름’은 두 팔을 벌려 안을 수 있는 분량이고, 아무도 모른다는 ‘한 길 사람 속’에 쓰인 ‘길’은 한 사람의 키 정도의 길이. ‘한 평’이면 사람이 얌전히 누울 정도의 넓이. ‘세 치 혀’에 쓰인 ‘치’나 영어 ‘인치’는 모두 손가락의 길이나 굵기에서 왔다.
몸으로 이 세계를 재는 민속적 척도는 뒷방 늙은이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쓰인다. 세월의 간극에서 오는 해석과 시선의 공존은 얼마나 반갑고 흥미로운가. 말을 포함해 세대차는 나면 날수록 좋다. 세대차 자체보다는 그걸 못 견뎌 하는 풍토가 문제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