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9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침수 피해 현장을 방문, 현장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이 반지하 주택에서는 발달장애 가족이 지난밤 폭우로 인한 침수로 고립돼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연합뉴스
손원제 |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 취임 뒤 100여일이 지났다. 세 장면이 떠오른다.
첫째, 7월5일 출근길 문답이다. ‘송옥렬, 박순애, 김승희 후보자 같은 경우 부실 인사, 인사 실패라는 지적이 있다’는 질문에 “전 정권에서 지명된 장관 중에 그렇게 훌륭한 사람 봤어요?”라고 반박한 장면이다. 이미 ‘인사’가 대통령 국정 수행 부정 평가 이유 1위로 떠오른 상황이었다. 이런 태도를 꿋꿋함이나 당당함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많지 않았다. ‘불통’과 ‘오만’만 더 생생하게 각인시켰다. 김건희 여사 순방 ‘비선 동행’ 논란과 대통령실 ‘사적 채용’ 의혹이 겹치며 대통령 국정 지지율은 7월8일 발표된 한국갤럽 조사에서 30%대로 주저앉았다.
둘째, 7월26일 권성동 원내대표에게 보낸 문자메시지다. 윤 대통령은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대표가 바뀌니 (우리 당도) 달라졌다”며 처음엔 많은 이들이 그 정체를 궁금해했던 이모티콘까지 달았다. 물고기 같았는데, 알고 보니 이준석 전 당대표는 한번도 못 받아봤다는 그 귀한 ‘체리 따봉’이었다. 민생 챙기기 바빠 당무 신경 쓸 틈이 없다던 윤 대통령의 공언이 허언임이 드러났다. 이를 당 지도부와 이모티콘으로 소통하는 젊은 감각, 열린 자세로 받아들일 사람은 많지 않았다. 친윤계 최고위원 줄사퇴와 비상대책위원회 구성, 이 전 대표의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이 이어지며 집권여당의 분열과 갈등은 더 격화하고 있다. 7월29일 발표된 한국갤럽 조사에서 윤 대통령 지지율은 바닥을 뚫고 20%대로 내려앉았다.
셋째, 8월8일 빗줄기를 뚫고 정시 퇴근한 장면이다. 100여년 만의 폭우로 강남역이 물에 잠기고, 신림동 반지하에서 일가족이 숨질 때 윤 대통령은 언덕바지 아크로비스타 아파트에서 전화로 상황을 보고받고 대처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몇통이나 통화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윤 대통령은 다음날 신림동 참사 현장을 찾은 자리에서 “(어제) 퇴근하면서 보니까 다른 아파트들이 벌써 침수가 시작되더라”라고 했다. 바로 그날 여름 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윤 대통령은 아침 출근길에 “늘 초심을 지키면서 국민의 뜻을 잘 받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휴가 기간 중에 더 다지게 됐다”고 했다. 그래 놓고 아파트들이 잠기는 걸 보고서도 퇴근을 고수했다. 강심장이다. 강승규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은 8월10일 “비가 온다고 대통령이 퇴근을 안 하나”라고 했다. 그 대통령에 그 참모, 놀라운 하모니다.
이미 민생 현안에 대한 윤 대통령의 무지와 무신경은 세기도 어려울 만큼 목격된 바 있다. 폭우 속 정시 퇴근을 ‘워라밸’ 정착을 선도하기 위해 욕먹을 걸 무릅쓰고 모범을 보인 사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무정부상태’ 해시태그가 번져갔고, 8월12일 발표된 한국갤럽 조사에서 국정지지율은 3주째 20%대에 머물렀다.
‘양두구육’은 이 세 장면으로 집약되는 윤 대통령의 집권 100일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한다. ‘양 대가리를 걸고 개고기를 판다’. 역대급 정실 인사를 해놓고 “그렇게 훌륭한 사람 봤느냐”고 한 것,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마저 이 전 대표에 관한 질문에 “민생 안전과 국민의 안전에 매진하다 보니 다른 정치인들께서 어떤 정치적 발언을 했는지 제대로 챙길 기회도 없었다”고 한 것, ‘초심’을 강조하고는 정시 퇴근한 것. 윤 대통령의 상습적 언행 불일치를 이보다 잘 요약하기도 어렵다. 이 말을 끄집어낸 이 전 대표에게 ‘체리 따봉’ 하나 보내고 싶다.
유례를 찾기 힘든 추락의 100일은 윤 대통령 개인과 정권에 대한 대응을 넘어 한국 대통령제 자체에 대한 회의와 성찰을 불러내고 있다. 대통령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코로나엔 ‘각자도생’, 폭우엔 ‘무정부 상태’로 홀로 맞서야 한다는 위기감이 우리 사회를 감싸기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임기는 이제 5%가 지났을 뿐이고, 여전히 57개월이 남아 있다. 대통령에게 임기 중 막강한 국정 전권을 보장하면서도 어떤 유의미한 책임도 지지 않게 한 대통령제의 비극이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삼권 분립과 견제 시스템도 취약하다. 유일한 비상 장치인 탄핵은 헌법과 법률 위배에 한정돼 있다. 무능과 나태에 대한 중도 심판은 불가능에 가깝다. 대통령의 실패가 또다시 국가와 국민의 실패로 이어지지 않도록 근본에서 숙고할 때가 됐다. 윤 대통령의 100일이 이를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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