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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대통령이 88번 외친 ‘자유’, 왜 울림 없을까 / 정남구

등록 2022-09-01 17:29수정 2022-09-02 02:40

윤석열 대통령이 8월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8월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정남구 |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은 오랜 검사 생활을 청산하고 정치인으로 변신할 때, ‘자유’를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로 내세웠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지난해 6월29일 출마선언에서 자유민주주의란 단어를 포함해 자유를 언급한 게 22번이었다. 대통령 취임사에서는 33번 언급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33번이나 자유를 말했다.

반복은 메시지의 설득 효과를 키우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8월26일 잭슨홀 미팅에서 제롬 파월 미국 연준 의장이 8분50초의 길지 않은 연설에서 ‘인플레이션’이란 단어를 45번이나 언급한 것이 바로 그런 사례다. 파월은 이 단어를 반복함으로써 인플레를 억제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공격적으로 올리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치인들이야말로 반복법의 강점을 잘 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승리’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희망’을 반복적으로 설파한 바 있다.

흔히 윤 대통령이 공정, 상식을 강조했다고 말하는데, 적어도 세번의 연설문을 뜯어보면 자유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공정은 출마선언에서 9번 나왔지만, 취임사에서는 3번으로 줄고,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사라졌다. 상식도 출마선언에서는 7번 언급했지만, 이후 두번의 연설에선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가 무엇인지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러니 그 단어에서 어떤 울림을 느끼기는 더욱 어렵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우리 국민의 마음을 울렸던 가치는 ‘대한독립’과 ‘민주’다. 1919년 3·1 운동 때 외쳤던 ‘대한독립 만세’는 어마어마한 정치 선언이다. 오로지 황제에게만 붙일 수 있는 ‘만세’를 ‘대한독립’에 붙이지 않았던가. 해방 뒤 이승만 독재와 군사독재 치하에서 사람들에게 희망은 ‘민주’에 모였다. 많은 가치 있는 것들이 그 안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민주’만으로 다 해소되지 못한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다. 세계 10위권에 바짝 다가선 경제규모는 빽빽한 숲에서 아주 가늘고 길게 솟아나 다른 키 큰 나무들과 햇볕을 다투는 모습이다. 고되고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노동, 소득과 자산 격차 확대에 따른 불만, 앞날에 대한 불안이 사람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안타깝게도 윤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는 그런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해갈이 돼주지 못하고 있다. 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취임사에서 한 말을 비슷하게 반복하고 있다.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와 사회적 갈등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이를 본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도약과 혁신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도약은 혁신에서 나오고 혁신은 자유에서 나옵니다. 민간 부문이 도약 성장을 할 수 있도록 규제를 혁신하겠습니다. 우리 기업이 해외로 떠나지 않고, 국내에 투자하고 일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과감하게 제도를 혁신해 나갈 것입니다.”

이 문장과 정부 경제정책으로 보건대, 경제영역에서 윤 대통령이 강조하는 자유는 이런 것이다. 대기업에 세금을 깎아주고, 노동자와 소비자, 하청·납품업자 등 약자를 보호하거나 공정한 거래를 지원하기 위한 각종 규제를 감면하고, 죄와 잘못에 형벌을 줄여주는 것이다. 주택·부동산에 투자하여 이익을 얻을 기회를 늘려주는 것이다. 고성장 시대의 향수에 젖어, 낡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 그 이상이 아니다.

더욱이 당면한 경제 상황은 그 ‘자유’에서 어떤 울림도 느끼기 어렵게 한다.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이 치솟아 물가가 올라 힘들고, 인플레이션에 대응하려고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리는데 가계는 이자 부담에 시달리고, 아직 일자리 사정은 괜찮지만 경기 후퇴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어 앞날이 걱정스럽다. 그런데 정부는 대기업과 부동산 자산가에게 감세하면서, 고용·복지 지출은 억제하겠다고 한다. 윤 대통령이 세차례 연설에서 88번이나 외친 ‘자유’에 따른 정책 집행은 걱정을 덜어주기는커녕 키우고 있다.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을 지낸 미국의 경영자 잭 웰치는 ‘중요한 메시지는 700번 이상 반복하라’고 했다. ‘자유’라는 메시지가 국민의 가슴과 머리에 닿지 않으면 더 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권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보단 일단 멈춰서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게 나을 것이다. 다음에 하는 연설에서 ‘자유’를 몇번이나 언급하는지 나는 또 세어볼 참이다.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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