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일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배러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주지사와 상원의원 후보들을 위한 연설을 하고 있다. 윌크스배러/AFP 연합뉴스
[특파원 칼럼] 이본영 | 워싱턴 특파원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백악관 자료 무단반출 사건과 관련해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자료 이름이 나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주고받은 친서들이다. 트럼프는 자기 것이라며 내놓지 않으려다가 설득 끝에 국립공문서관에 반납했다고 한다.
2020년 미국 대선 때 일부 한국인들이 느꼈을 딜레마가 떠오른다. 두차례 ‘역사적’ 북-미 정상회담은 소득 없이 끝났지만, 그래도 트럼프가 재집권한다면 혹시 불씨를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일부 있었다. 판문점 만남까지 포함해 북한 정상을 세차례나 만난 미국 대통령이라는 점만으로도 그를 한반도 데탕트를 위한 자산 목록 상단에 올려줘야 할 것 같았다.
한편으로 트럼프는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을 5배나 올리라는 막된 요구로 원성을 샀다. 이는 새털처럼 많은 일화 중 하나일 뿐이다. 휘하에 있던 이들이 그의 무수한 엽기적 언동을 회고록에 써 돈벌이를 했다. 지난 대선 때 평화롭고 민주적인 국제질서를 희망한다면 차마 그의 당선을 바란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반도 평화를 열망하는 진보적 시민들일수록 딜레마가 컸을 것이다.
희망과 모욕을 번갈아 안긴 트럼프에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는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 그대로 반영됐다. 집권 첫해인 2017년에 한국인들의 그에 대한 신뢰도는 17%에 불과했다. 북-미 정상외교가 가동된 2018년 44%, 2019년엔 46%까지 올라갔다. 북-미 협상이 수포가 되고 방위비 분담금 소동을 겪은 2020년에 다시 17%로 곤두박질쳤다.
지금 미국 정치판 형세는 2020년의 고민을 다시 하게 만들 공산이 있어 보인다. 공화당에서 트럼프의 대세론은 꺾일 줄 모른다. 첫 임기에 이어 곧바로 연임에 성공하지 못한 대통령이 나중에 백악관에 다시 들어간 적은 없다. 하지만 상식과 정치 공식을 파괴하며 집권한 그가 또 이변을 일으키지 말라는 법은 없다. 반면 올해 11월이면 만 80살이 되는 조 바이든 대통령을 두고서는 대권 재도전에 대한 회의론이 상당하다. 지금으로선 바이든을 대체할 만한 뚜렷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 민주당은 연방수사국(FBI)의 비밀자료 반출 수사가 트럼프를 격침하기를 바라는 눈치다.
트럼프가 재집권한다면 북한과의 ‘조건 없는 대화’만 되뇌는 바이든 행정부와 달리 어떤 돌파구를 찾으려 할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하지만 곰곰이 새겨보면 막연한 기대는 접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못지않게 중요한 게 그것을 하려는 진심과 절박함이다. 트럼프는 문재인 정부가 차린 잔치 마당에서 상석에 앉아 생색을 내다 성에 차지 않자 잔칫상을 엎은 인물이다. 협상 결렬의 책임은 북쪽도 나눠 져야 하지만, 애초 그에게는 진심과 절박함이 없어 보였다.
밥 우드워드는 저서 <격노>에서 2018년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난 트럼프의 신경이 어디에 가 있었는지를 소개했다. 트럼프는 우드워드와의 인터뷰에서 “역사상 어떤 인간보다 많은 카메라를 봤다. 수백개는 됐다”고 자랑했다. 아카데미 시상식보다 많은 카메라가 자기를 비췄다고 했다. 나아가 “그것은 공짜였다”며 “난 한푼도 쓰지 않았다”고 했다. 과시와 자기 홍보에 열정적인 그에게 대대적인 무료 홍보는 흥분할 일이었다. 북-미 정상회담을 놓고도 개인적인 돈 계산을 하고, 그것을 자랑거리로 내세운 인물이 트럼프다.
아무 데서나 돈 따지는 사람을 속물이라고 한다. 속물이 역사 발전에 기여한 사례가 있던가? 트럼프의 재림 가능성은 오로지 긴장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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