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의 1991~2021] _37
BDA에 묶여 있던 북의 52개 계좌 2500만달러는 ①BDA→②마카오 중앙은행→③뉴욕 연방준비은행→④러시아 중앙은행→⑤러시아 극동상업은행(블라디보스토크)→⑥조선무역은행(평양)을 잇는, 지구를 한바퀴 도는 복잡하고 긴 송금 절차를 밟아 북한 수중에 돌아갔다. 네오콘이 싸지른 ‘똥’을 치우는 데, 미·중·러 3개국 정상과 북·미·중·러 4개국 중앙은행이 동원돼야 했다.
‘동북아시아 탈냉전 청사진’으로 불린 9·19 공동성명을 채택한 2005년 9월19일 4차 6자회담 2단계 회의 폐막 전체회의의 분위기는 뜻밖에도 무겁고 차가웠다.
미국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은 “북한의 인권 침해, 생화학무기 계획, 탄도미사일 계획과 확산, 테러리즘, 불법 행위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는 것이 미-북 관계 정상화 논의의 필요조건”이라고 못박았다. 잔칫상에 재를 뿌리는 듯한 힐의 발언은 “(북한과 같은) 적들과 협상하는 것은 나약함의 표현”이라는 비뚤어진 신념으로 무장한 워싱턴의 “네오콘과 초강경 보수주의자들”(<미국 외교의 최전선>, 304~305쪽)을 의식한 강경 몸짓이었다. 당면 최대 현안인 ‘북핵 폐기’에 집중하기는커녕 미국의 모든 관심사를 협상 탁자에 펼쳐놓으려는 듯한 힐의 이 종결 발언은, 한국 수석대표 송민순이 그토록 경계한 “하나의 망치로 여러개의 못을 동시에 박으려는 것만큼 현명치 못한 일”(<빙하는 움직인다>, 111쪽)이었다. 북한 수석대표 김계관은 “힐 선생의 발언은 마치 결별선언으로 들린다. 이제부터 더 큰 산을 넘어야 한다는 느낌이 든다”고 맞받았다.
워싱턴의 네오콘들은 힐을 앞세운 ‘대리 경고’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북을 옥죌 새 비밀병기를 꺼내 들었다. ‘방코델타아시아(BDA·비디에이) 사태’가 그것이다. 미 재무부는 6자회담이 한창이던 2005년 9월15일(한국시각 9월16일)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마카오 특별행정구’ 소재 은행인 ‘비디에이’를 “돈세탁 우선 우려 대상 금융기관”으로 예비지정한 사실을 관보에 실었다고 발표했다. “비디에이는 북과 특별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북의 국가범죄 수행을 도왔다”며, 이 조처의 표적이 북한임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비국가 행위자인 알카에다의 ‘9·11 테러’에 대응해 국제 테러리즘을 뿌리 뽑겠다며 만든 ‘애국법 311조’의 첫 적용 대상이 ‘국가 행위자’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 이 발표 이후 고객의 대량인출 사태(뱅크런)에 비디에이가 휘청이자 마카오 당국은 2005년 9월28일 ‘비디에이 예금인출 동결’ 조처를 했고, 이 은행의 북한 계좌 52개, 2500만달러도 함께 묶였다.
6자회담 와중의 미 재무부 발표는 “협상을 총체적으로 이탈시키려는 의도가 강했다”며 “협상에 대한 도전이라는 시각이 6자회담 당사국 사이에 지배적이었다”고 힐은 회고록 <미국 외교의 최전선>(311~312쪽)에 적었다. 비디에이 제재를 실무적으로 주도한 재무부 차관 스튜어트 레비가 “네오콘인 볼턴의 정치적 측근”이라는 폭로와 함께. 스기타 히로키는 <미국의 제재 외교>에서 미 재무부의 이 발표를 “북한을 노린 미국의 금융제재”라고 규정했다.
9·19 공동성명 채택 50여일 뒤에 열린 5차 1단계 회의(2005년 11월 9~11일)는 합의 없이 사흘 만에 끝났다. 네오콘의 ‘비디에이 폭탄’에 6자회담 협상장이 쑥대밭이 된 탓이다. 김계관은 11월 7일과 10일 송민순을 따로 만나 “싱가포르에서 무슨 물건을 사 오려고 해도 송금이 안 되니 마대에 돈을 싸가야 한다”거나 “금융제재는 살점을 떼어내는 것과 같아서 결코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빙하는 움직인다>, 203~205쪽) 이후 김계관은 “금융은 피와 같다. 이것이 멈추면 심장도 멈춘다”며, 비디에이 사태 해결이 없이는 협상 탁자에 앉을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힐은 재무부의 ‘비디에이 제재’를 “6자회담을 방해하려는 노림수”로 여겼지만, 정작 김계관 등 6자회담 협상 상대방을 만나선 “그건 그저 법집행일 뿐”이라거나 “제재와 관련해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잦아드는 목소리로 대꾸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며칠 간격의 9·19 공동성명 합의와 비디에이 제재는 “부시 행정부 안의 이데올로기적 전쟁 상태”(<미국 외교의 최전선>, 319쪽)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희비극이었다.
6자회담의 협상 동력이 빠르게 약화했고, 그만큼 한반도·동북아 정세의 긴장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흔히 금융·경제제재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으로 불린다. “경제제재는 국제분쟁에서 전쟁을 대신하는 수단”이자 “전쟁보다 훨씬 좋은 수단”(스티븐 므누신, 트럼프 행정부 재무장관)이며 “21세기형 정밀무기”(마이클 헤이든, 부시 행정부 중앙정보국장)라는 미국 사람들의 자찬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5차 1단계 회의 결렬 뒤 북·미·중 수석대표 회동(2006년 1월18일, 베이징)과 북-미 금융문제 실무접촉(2006년 3월7일, 뉴욕) 등이 있었지만 돌파구는 열리지 않았다. 북은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 방북’을 제안했다. 그런데 “(조지 부시) 대통령이 북한 문제를 풀려고 중국이나 다른 나라와 협력하는 데 주력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대통령 등 뒤에서 음모를 획책”해온 “부통령 체니를 비롯해 볼튼, 밥 조셉, 에릭 에델만 등 네오콘”(<미국 외교의 최전선>, 350~351쪽)이 나서 이를 거부했다.
협상으로 비디에이 사태를 풀기 어렵다고 판단한 북은 특유의 무력시위로 길을 열려 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해 미국의 독립기념일(7월4일)에 맞춰 대포동 2호와 노동·스커드 등 각종 탄도미사일 7발을 섞어 쐈다. 유엔은 첫 대북제재 결의(안보리 결의 1695호, 2006년 7월15일)로 북의 폭주를 멈추려 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사상 첫 핵실험(2006년 10월9일)으로 응답했다. 한반도 정세가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안갯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북이 “핵실험이라는 사실상의 레드라인(금지선)”(송민순)을 넘어서자 미국의 대응이 달라졌다. 유엔 안보리 결의 1718호(2006년 10월14일) 채택으로 대북제재 강도를 높이는 한편으로 북을 6자회담 협상장으로 돌아오게 하려 외교력을 쏟았다. “(2006년) 10월 북한의 지하 핵실험이 있었던 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협상에 복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조용히 중국 외교부장과 전화 접촉에 나섰”고, 이어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인 바누아투에 출장을 간 힐을 베이징으로 급파해 김계관과 비공개 양자 협의를 하게 했다.(<미국 외교의 최전선>, 316~323쪽)
덕분에 북 핵실험 두달여 뒤인 2006년 12월18~22일 5차 2단계 회의가 열렸다. 북은 회담 종료 직후 미국과 비공개 실무협의 때 “유럽에서 조용히 만나 협의를 지속하자”고 제안했고, 라이스 장관은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 힐을 베를린으로 보냈다. 2007년 1월16~18일 베를린에서 김계관과 힐이 비공개로 만났다. 힐은 ‘비디에이 문제 해결’을 약속했고, 김계관은 “핵시설을 불능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화답했다.(<미국 외교의 최전선>, 317~326쪽) 둘의 만남 직후 열린 5차 3단계 회의(2007년 2월8~13일)에서 ‘2·13 합의’라 불릴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처”가 채택됐다.
부시 행정부는 약속대로 비디에이 제재 해소에 나섰다. 비디에이에 묶여 있던 북의 52개 계좌 2500만달러는 ①비디에이→②마카오 중앙은행→③뉴욕 연방준비은행(FRB)→④러시아 중앙은행(모스크바)→⑤러시아 극동상업은행(블라디보스토크)→⑥조선무역은행(평양)을 잇는, 지구를 한바퀴 도는 복잡하고 긴 송금 절차를 밟아 2007년 6월25일 북한 수중에 돌아갔다. 네오콘이 싸지른 ‘똥’을 치우는 데 미·중·러 3개국 정상과 북·미·중·러 4개국 중앙은행이 동원돼야 했다. 그날 북 외무성 대변인은 “우리 요구대로 동결 자금 문제가 해결됐다”며 “우리도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2·13 합의 이행에 들어갈 것이고 그 일환으로 26일부터 평양에서 국제원자력기구 실무대표단과 핵시설 가동중지·검증감시와 관련한 협의를 하게 된다”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했다.
힐은 ‘비디에이 소동’을 두고 “북한 계좌 2500만달러 동결은 북한 경제에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은행계좌를 동결한 유일한 효과는 후속 협상을 18개월간 궤도 이탈시켰다는 점”이라는 냉소적 평가를 회고록에 남겼다. 송민순은 “비디에이에 예치된 북한의 돈은 2500만달러 정도에 불과했지만, 결국 그 돈 때문에 6자회담은 21개월간이나 발목이 잡혔고 그사이 북한은 2006년 10월, 핵실험이라는 사실상의 레드라인도 넘었다”고 한탄조로 회고록에 적었다.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차례의 남북정상회담, 여섯차례의 북한 핵실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차례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nomad@hani.co.kr
2006년 10월9일 오후 서울역 대합실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시민들이 북한의 1차 핵실험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텔레비전으로 지켜보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차례의 남북정상회담, 여섯차례의 북한 핵실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차례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이슈6자회담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