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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벌거벗은 대통령’ 그려도 무사할 자유

등록 2022-09-25 17:42수정 2022-09-26 02:42

[아침햇발]
지난 1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주변에 윤석열 대통령을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표현한 포스터를 붙이고 있는 이하씨. 이하씨 페이스북 갈무리
지난 1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주변에 윤석열 대통령을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표현한 포스터를 붙이고 있는 이하씨. 이하씨 페이스북 갈무리

강희철 |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얼마 전 ‘벌거벗은 임금님’이 됐다.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의 앞섶을 망나니처럼 풀어헤친 채 웃고 있다. 와이존에는 금지를 뜻하는 붉은 픽토그램 아래 부인 김건희 여사의 얼굴 캐리커처가 선명하다. 며칠 전 이런 그림이 용산 대통령실 주변에 나붙어 논란이 됐다.

의도는 명확하다. 포스터를 그려 붙인 이하라는 이는 유튜브 채널 <서울의 소리>에 대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서 불행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한테 청량감을 주고 싶었다.”

사이다 맛이라고 환호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스럽다며 얼굴을 찌푸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각자가 호오의 감정을 느끼는 선에서 그쳤다면 더 이상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런데 경찰이 득달같이 달려들면서 차원이 달라졌다. 이젠 사법적 판단의 영역으로 끌려들어가기 직전이다. 이런 일에 늘 그렇듯 경찰은 신속하게 내사 사실을 공표하고, 벌써부터 ‘옥외광고물관리법 위반’을 들먹이고 있다. 언론과 사람들의 관심은 이씨의 처벌 여부로 옮겨갔다. 하지만 진짜 시험대에 오른 사람은 윤 대통령이다.

과거 대통령들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처벌이 이어졌다. 경찰이 일차로 훑어 송치하면 검찰은 적당한 죄목을 붙여 기소했다. “법원에 가서 무죄가 나더라도 일단 기소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전직 검찰총장)이 이런 경우다. 최고 권력자가 조롱을 당했다고 생각하는데 ‘아랫것’들이 못 본 척 좌시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과거 권위주의 시대처럼 ‘국가원수모독죄’라는 만능 치트키가 있는 것도 아니니 결국엔 옥외광고물관리법이나 경범죄처벌법을 동원해 기어코 ‘불경의 대죄’를 물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거나 그러지 말라고 말린 대통령은 찾아볼 수 없다. 이하라는 이름이 익숙한 것도 실은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비슷한 활동으로 유죄를 받은 전력이 있어서다. ‘인권 대통령’을 자처한 문재인 전 대통령도 불관용의 쳇바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는 대선 때 말했다. “(납득할 수 없는 비판, 비난도) 참아야죠. 그렇게 권력자를 비판함으로써 국민들이 불만을 해소할 수 있고, 위안이 된다면 그것도 좋은 일 아닙니까.”

집권 이후엔 달랐다. 한 대학생은 홍콩 민주화 시위가 한창이던 2019년 11월 완전 개방돼 있는 단국대 천안캠퍼스에 들어가 문 대통령의 소극적 대중 외교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였다가 건조물 침입 혐의로 기소됐다. 언론 보도로 시끄러웠던 이 사건을 대통령이 몰랐을까. 그 학생은 올해 5월에야 무죄가 확정됐다. 문 전 대통령은 자신을 비방하는 전단지를 뿌린 30대 김아무개씨를 모욕 혐의로 직접 고소하는 진기록도 남겼다. 김씨가 휴대전화를 압수당하며 강도 높은 수사를 받고 있던 2020년 8월, 문 대통령은 교계 지도자 모임에서 “대통령을 모욕하는 정도는 표현의 범주로 허용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러다 2021년 5월 고소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논란이 커지자 그제야 고소를 취소했다.

이제는 윤 대통령 차례다. 전임자들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전임자들을 반면교사로 삼을 것인가. 경찰의 처분은 대통령의 심기에 달렸다. 한데, 이번 유엔 연설에서 21번, 취임사에서 35번, 광복절 경축사에서 33번, 도합 89번이나 ‘자유’를 예찬한 윤 대통령이지만, 정작 다른 모든 자유의 바탕이 되는 표현의 자유에 관해서는 언급이 드물고 상황 따라 편차도 크다. “표현의 자유는 정치적 자유의 전제이고, 강력하게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권”(지난 2월18일 페이스북)이라고 밝힌 적도 있지만, 그 무렵 김 여사 비하 논란을 부른 ‘마이클 잭슨을 닮은 여인’이란 노래에 대해선 “표현의 자유도 상식의 선은 지켜야 한다”며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 바 있다. 이하의 이번 그림에는 마침 김 여사가 등장한다.

윤 대통령이 좋아하는 미국에선 대통령에 대한 비난과 모욕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오바마는 영화 <배트맨>의 백인 악당 ‘조커’로, 트럼프는 히틀러로 묘사당한 적이 있다. 그래도 호오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질 뿐 수사로 이어지진 않는다. “대통령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거나, 옳든 그르든 대통령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비애국적이며 맹종적일 뿐 아니라 국민에게 도덕적으로 반역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런저런 공격에 진저리를 낼 만한 미국 대통령(시어도어 루스벨트)이 자신의 입으로 한 말이다. 무려 116년 전 노벨상 수상 소감을 굳이 인용해야 하는 우리 현실이 딱하고 민망하다.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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