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늙으면 애가 된다’는 얘기는 ‘말’에도 그대로 쓸 수 있다. 노인은 혼잣말을 쓰면서 애가 된다. 노인의 혼잣말은 노년의 외로움과는 상관없다. 나처럼 현실에 안주하며 편하게 사는 자들의 입에서도 혼잣말이 줄줄 새어나오는 걸 보면.
아이는 사람 대하듯 사물을 대한다. 사람처럼 사물에도 마음이 있다고 여긴다. 혼자인데도 사물과 대화하며 쉼 없이 쫑알거린다. 노인도 아이처럼 사물에 말을 거니 혼잣말이 늘 수밖에. 낡은 집 벽에 난 금을 보면서 ‘조금만 더 버텨줘’라 하고, 아침에 울리는 자명종 소리에 ‘이제 그만 좀 울어’라 한다. 게다가 혼잣말은 늘 반말로 하게 되는데, 감탄사나 신음소리를 닮았다. ‘쯧쯧, 저러면 안되지’ ‘젊은이가 고생이 많군’ ‘벌써 가을이네’ ‘이놈의 세상, 뒷걸음질만 치는군’ 겉으론 말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성보다는 감성에 더 가깝다.
실제로 생각은 말을 능가한다. 말의 검문을 받지 않고도 생각할 수 있다. ‘가을바람, 빨래, 춤….’ 뭐든 생각해 보라. 말이 없어도 특유의 느낌, 소리, 색깔, 장면, 움직임이 떠오른다. ‘연필’이나 ‘양말’, ‘짜장면’ 같은 사물도 고유한 생김새가 떠오르고 그걸로 뭔가를 하는(쓰거나 신거나 후루룩 먹는) 장면이 함께 떠오른다. 감각만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끝까지 말의 끈을 놓지 못한다. 인간은 처음부터 사회적(대화적, 상호적) 존재라는 걸 확인하는 열쇠가 말이기라도 하듯이. 혼잣말은 사람이 아무리 혼자 있어도 사회 속에 있다는 걸 확인해준다. ‘개인과 사회’가 아니라, ‘사회 속 개인’이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