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의 주인공 김인선씨(왼쪽)와 이수현씨. 반평생을 함께해온 두 사람은 지난 8월31일 독일 혼인청에서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다. 반박지은 감독 제공
이지혜 | 경제팀 기자
대특종도 아니고 그럴싸한 상을 탄 기사가 아니어도,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기사를 기자라면 하나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게도 문득 떠올리면 내심 뿌듯해져 종종 꺼내 읽는 기사가 하나 있다. 약 4년 전 독일 베를린에서 만난 김인선씨와 나눈 인터뷰 기사 ‘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나, 천사인 척하고 싶지 않아”’다.
1972년 22살의 나이로 독일에 건너가 정착한 ‘1세대 이주 간호사’ 인선씨는 독일 땅에서 생을 마감하는 이주민들의 임종을 지켜온 호스피스다. 그의 활동이 독일과 한국에서 꽤 주목을 받은 터라, 2010년대 초부터 국내 매체에선 ‘재독 호스피스 김인선’을 독자에게 소개해왔다. 하지만 이 기사들은 인선씨를 절반만 보여줬다. 그는 파독 광부와 결혼하고 뒤늦게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혼을 감행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내 기사는 반평생을 동성 연인 이수현씨와 함께해온 ‘성소수자 김인선’을 집중 조명한 초기 인터뷰 중 하나였다.
토요일치 신문 1개 면을 털어 실은 그 인터뷰는 나름 반향이 있었다. 이주민·성소수자·여성이라는 다층적 소수자성을 가진 인터뷰이의 삶 자체가 경이로웠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럽 사회였기에 드러날 수 있었던, 한국에선 쉬이 찾아볼 수 없는 ‘레즈비언 할머니’의 롤모델이기도 했다. 물론 퀴어 이슈를 다룬 기사에 귀신같이 따라붙는 ‘악플’도 쏟아졌다. 악플에는 이골이 난 지 오래였지만 특히 날 억울하게 만든 반응도 있었다. “그냥 조용히 살지 뭐 자랑이라고 나대냐.” 내 잘못으로 인선씨가 괜한 소리를 듣게 된 건 아닐까 싶어 주눅이 들었다.
다시 용기를 얻은 건 남몰래 조용한 기적을 엿본 뒤였다. 기사가 나간 뒤 드문드문 인선씨 연락처를 묻는 메일이 날아들었다. 보낸 이는 대체로 40~50대 여성이었으며, 조심스럽게 자신이 겪고 있는 혼란을 고백했다. 자신도 인터뷰 속 주인공처럼 늦은 나이에 이르러 동성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이 복잡한 감정에 관해 인선씨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냐고 물었다. 꼭 귓가에 사각거리는 속삭임 같은 메일이었다. 마침내 자신의 ‘벽장’을 열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기까지 그들이 얼마나 길고 긴 망설임의 시간을 보내왔을지 상상해보자니, 그깟 악플 따위가 대수냐 싶었다.
이 비밀스러운 메일들은 “조용히 살지 뭐 하러 나대냐”에 대한 정확한 반박이다. 아무리 ‘침묵하라’는 압박이 거세도 인선씨 이야기를 기어코 전해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인선씨의 목소리가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던 벽장 속 성소수자에게 작은 ‘노크’로 가닿아 자신을 직면할 용기로 싹트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감히 생각했다. 그 인터뷰가 세상을 구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어떤 이의 세상을 바꿔놓긴 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2018년 인터뷰 당시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던 인선씨는 지난 8월31일 독일 혼인청에서 수현씨와 법적 부부가 됐다. 지난주 부산에서 이 늦된 신혼부부를 만날 기회가 생겨 직접 축하를 전할 수 있었다. 이들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으로 오른 참에 부부가 함께 한국을 찾은 것이다. 일흔을 넘겨 결혼을 결심한 이유와 소감을 물었더니, 수현씨가 답했다. “나이 먹고 이 친구(인선씨)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결혼 생각을 줄곧 했어요. 이 친구가 중환자실에 있어도 나는 가족이 아니라 의사 면담도 못 하니까요. 퇴원하고 곧장 손 붙잡고 독일 혼인청으로 갔어요. 결혼한 뒤 병원에 따라가서 ‘우리는 가족’이라고 했더니 진료실에 들어와도 된대요. 차이를 절실히 느꼈습니다.”
여전히 한국 퀴어들은 법적으로 부부가 될 수 없고 아무리 늙고 쇠약해져도 가족 자격으로 자기 짝을 의사에게 데려가지 못한다. 만일 독일 퀴어들이 “조용히 살지 뭐 하러 나대냐”는 말에 풀죽어 침묵했다면, 이 70대 레즈비언 커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인선씨와 수현씨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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